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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일흔넷 두 노인 인생, 겉보기와 완전 딴판

입력 | 2013-06-25 03:00:00

실험극장 창작극 ‘배웅’ ★★★☆




노인 전문 요양병원을 무대로 웃음과 눈물을 안겨주는 창작극 ‘배웅’의 두 돛대와 같은 배우. 우락부락한 외모와 반대로 30년간 교편생활을 한 먹물 순철 역을 맡은 이영석(왼쪽)과 깡마른 체격에 외항선장 출신의 주책바가지 봉팔 역을 맡은 오영수. 극단 실험극장 제공

대조적 삶을 살아온 두 할배가 만났다. 30년 넘게 국어교사로 재직하다 은퇴한 순철(이영석)과 참치잡이 외양어선 선장이던 봉팔(오영수)이다. 일흔넷 동갑으로 똑같이 상처한 두 사람은 어느 요양병원 병실 환우로 조우한다.

두 사람은 살아온 이력만큼 성격도 판이하다.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에 예민한 순철이 내성적이고 과묵하다면, 여자 꽁무니 쫓아다니기 바쁜 봉팔은 외향적이고 수다스럽다. 순철이 이성적이라면 봉팔은 감성적이다.

병원 터줏대감으로 살아온 봉팔은 옆 침대에 열한 번째 환우로 찾아든 순철에게 자기 방식의 요란한 오리엔테이션을 펼친다. 하지만 순철은 시집간 외동딸에게 부담 주기 싫어 여행 간다고 거짓말하고 몰래 입원한 처지라 그런 봉팔이 거북하고 귀찮다.

결국 두 할배는 유치원생처럼 다툰다. 서로의 말꼬리를 잡다가 귀를 막고 자기 할 말만 하더니 급기야 욕설까지 주고받는다. 순철에겐 봉팔의 텃세지만, 봉팔에겐 순철의 냉대다.

하지만 숯과 얼음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은 나잇값을 할 줄 안다. 서로가 감추고 싶어 하는 속살을 슬쩍슬쩍 훔쳐보면서 동병상련의 정을 차곡차곡 쌓게 된다. 순철은 의사 사위까지 뒀지만 짐이 되기 싫어 홀로 죽음을 맞으려 하고, 봉팔은 자신의 보험금으로 아들네 빚 갚으려 병원 신세를 지는 슬픈 ‘나이롱환자’다.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봉팔이 치매에 걸리지 않겠다고 아침마다 주문처럼 외우는 시베리아횡단철도 역 이름을 통해 극적 전환을 맞는다. 그 소리를 못 견뎌 하던 순철이 어느새 봉팔과 함께 나란히 외우기 시작한 것이다.

“완도에서 배를 타고 목포 내려서/기차를 타고 광주 익산 서울 도라산/개성 평양 나진 선봉 두만강 브라디보스토크/브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 천국열차에 몸을 싣고….”

극단 실험극장의 창작극 ‘배웅’(강석호 작, 민복기 각색·연출)은 이렇게 황혼 녘에 맺게 되는 슬프고도 훈훈한 우정을 그려낸다. 2000년 초연된 한 신문사 신춘문예 당선작 단막극을 14년 만에 장막극으로 발효시킨 작품이다.

장막극으로 바뀌면서 2인극에서 의사와 간호사가 등장하는 4인극으로 덩치가 커졌지만 봉팔과 순철 두 칠순 노인에게 초점을 둔 드라마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어찌 보면 노년의 우정을 다룬 다른 많은 작품과 큰 차별성이 없어 보이는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껍질과 다른 속살’을 으깨 씹는 맛에 있다.

극 초반에 까다로워 보이는 순철은 실제론 ‘꼬랑내 나는 코골이’임이 드러난다. 게다가 젊은 시절엔 훈장질보다는 춤을 배우고 싶어 했던 끼 많은 남자였다. 반면에 난봉꾼 행세하는 봉팔은 평생 마누라 하나만 사랑했던 순정남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가 입에 달고 살던 ‘금발의 나타샤’라는 항구의 여인이 실제론 자신이 배 타고 나갈 때마다 기다려주던 아내였음이 밝혀진다.

이런 반전효과는 ‘3월의 눈’에서 장오 역을 고 장민호와 나눠 맡은 깡마른 노배우 오영수(69)와 영화 ‘마더’에서 원빈의 비밀을 아는 고물장수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성격파 배우 이영석(54)의 대조적 외모와 숙련된 연기를 통해 더욱 빛을 발한다. 두 배우 중 누가 친구의 마지막 길을 배웅할 것인가.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뜨겁게 적신 눈시울에 당황하는 어르신 관객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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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7일까지 서울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 2만5000원. 02-889-3561, 2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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