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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김정일 앞에서 한없이 비굴했던 대한민국 대통령

입력 | 2013-06-26 03:00:00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의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본 사람들의 소회는 한마디로 “기가 막힌다”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정상 간의 대화라고 할 수 있는가. 마치 계열사 사장이 그룹 총수를 찾아가 미주알고주알 보고하는 장면이 떠오른다. 총수는 “시간이 없다”며 일어서려 하고 월급쟁이 사장은 “조금만 더 들어 달라”며 소매를 붙잡는 모습이다.

노 전 대통령은 김정일과 아리랑 공연을 함께 관람하고 싶다면서 어려운 부탁을 한 양 “아이고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이 “장군님께서 일정이 바쁘시기 때문에…”라며 끼어들자 김정일은 “일없어(괜찮아), 일없어”라며 제지했다. 마치 통 크게 아량을 베푸는 모습이다. 김정일에게 회담 시간을 연장해달라고 매달리는 모습도 그렇다. 그는 “여기까지 와서 위원장하고 달랑 두 시간 만나 대화하고 가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됩니까”라며 비슷한 말을 되풀이했다. 대통령의 격(格)도, 국가의 체면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김정일이 면전에서 (한국이) 자주성이 없다고 타박하자 노 전 대통령은 반박은커녕 맞장구를 친다. 노 전 대통령은 “남측의 어떤 정부도 하루아침에 미국과 관계를 싹둑 끊고 북측이 하시는 것처럼 이런 수준의 자주를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이자 세습독재정권인 북한 지도자 앞에서 “세상에 자주적인 나라가 북측의 공화국밖에 없고…”라고 하는 데는 말문이 막힌다. 그는 자주국방, 주적(主敵)개념 폐지,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미 2사단의 후방 배치, 작계5029 폐지 등을 자랑하듯 언급하며 “자꾸 너희들 뭐하냐, 이렇게만 보지 마시고요,…이렇게 보시면 달라지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적장(敵將)에게 우리의 중대한 국방정책을 이해해 달라고 하는 게 주권국가의 원수이자 군 통수권자가 할 말인가.

노 전 대통령은 김정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친북반미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여론조사를 해봤는데, 제일 미운 나라가 어디냐고 했을 때 그중에 미국이 상당 숫자 나옵니다”라는 대목은 마치 고자질하는 투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내내,… 국제무대에 나가서 북측 입장을 변호해 왔습니다”라는 말이나 국제사회가 합의한 방코델타아시아(BDA) 제재를 “미국의 실책”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북핵을 옹호한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일본이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대단히 중시하는 걸 알면서도 “(일본이) 생트집을 잡고 있다고 써놓은 책도 있고…”라고 한 것도 경솔하다.

노 전 대통령은 김정일의 서울 답방과 관련해 “남측 방문은 언제 해 주실랍니까”라고 질문을 해놓고 김정일이 정세 핑계를 대자 “남측은 데모가 너무 자유로운 나라라서 모시기도 그렇게…”라고 오히려 미안해하듯 말했다. 김정일이 ‘한국을 가더라도 내가 아니고 김영남이 가기로 김대중 대통령과 얘기가 돼 있다’고 한 발언도 분명히 따져봐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은 “위원장께 청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임기 마치고 난 다음에,…평양 좀 자주 들락날락할 수 있게 좀…”이라고 매달렸다. 전직 대통령이 무엇 때문에 구걸하듯 해가며 북한 땅을 밟고 싶어 했는지 궁금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에 이바지한 사회 각계를 향해 온갖 험한 말을 쏟아내던 노 전 대통령이 북의 독재자에게는 어찌 그리 순한 양처럼 굴었는가. 야당은 문서공개 과정을 문제 삼으며 국익과 국격을 해치고 상식에 어긋난 행태라고 맹공한다. 본말전도(本末顚倒)다. 먼저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이 국익과 국격과 상식에 맞는지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공개 형식을 따지는 게 순리다. 국가와 국민과 동맹국을 가벼이 여긴 대통령에게 5년간이나 국가의 운명을 맡겨 놓았다니 돌아보면 아찔하고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