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55>김옥길
김옥길 총장(오른쪽)은 임기가 끝난 후 “더 맡아 달라”는 주변의 청을 거절하고 문경새재 산기슭으로 거처를 옮겨 조용히 말년을 보낸다. 1982년 1월 동생 김동길 연세대 교수와의 단란한 한때. 동아일보DB
김옥길 총장도 11월 30일 정부에 건의서를 보내는 ‘행동’에 나섰다. 그는 건의서에서 ‘이화여대를 포함한 대학생들이 선언문이나 결의문에서 표명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조목조목 나열했다. 그가 지적한 것들은 △정보수사기관의 지나친 간섭과 횡포, 거기에 따르는 불신풍조의 증대, 부정부패 △언론·집회·결사의 자유의 지나친 위축 △김대중 씨 납치사건에 대한 의심 등에서 오는 불신과 반발 △일본 자본에 대한 지나친 의존에 관한 염려 △일본인 관광객에게 유린당하는 여권(女權)에 대한 울분 △빈부의 격심한 차이에 대한 의분(義憤) △구속·구류된 학우들에 대한 우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걸쳐 있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를 밑바닥에서부터 전한 용기에 찬 내용이었다. 김 총장은 사태 해결을 위한 정부의 용단을 촉구했다.
여기서 우리는 교육계의 큰별이었던 고 김옥길 총장(1990년 작고)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세기 씨는 김옥길 평전 ‘자유와 날개’(이화여대 출판부)에서 앞서 언급한 1973년 11월 28일 이화여대 시위에서 김 총장이 보여준 제자에 대한 사랑과 담대함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대강당을 가득 채운 이화여대 학생들과 교수 200여 명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그날 밤을 꼬박 새웠다. 철야로 진행된 이날 기도회에서 김 총장은 내내 침묵으로 학생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리고 새벽 5시가 되자 단상에 올랐다. 학생들의 환호성과 함께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시위 현장에서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자신들의 말을 끝까지 들어준 지도자이자 스승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날 학생들의 희생과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은 김 총장이 데모 행렬의 선두에서 학생들의 진출을 저지했기 때문이고 학생들도 저지선을 뚫지 않고 총장의 지시를 따라 준 결과였다.…아침에 경찰이 주동 학생을 연행하러 왔을 때도 그는 학생회장 등을 총장 공관에 피신시키고 직접 서대문경찰서로 가서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서 학생들을 구속되지 않게 막았다.’(‘자유와 날개’)
김 총장의 단호하면서도 따뜻한 용기에 대해 당시 언론들도 ‘극도로 위급한 최악의 사태에서 한 사람의 희생자 없이 학생들을 보호하고 학교 안으로 시위를 유도한 김 총장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통해 칭송할 정도였다.
김 총장이 마냥 학생들 편을 든 것도 아니었다. 그는 교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젊은이들을 향해 ‘기다림’을 주문했던 큰어른이었다. 당시 그의 어록 중 한 대목이다.
김 총장은 재임기간 내내 학생시위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서 있어야만 했지만 학생들을 거리로 진출시키지 않고 교내 비폭력 시위를 끈질기게 유도하면서 ‘때’를 기다릴 것을 촉구했던 것이다. 또 아우 김동길 연세대 교수가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후에는 어머니처럼 누나처럼 투옥된 민주 인사 가족들을 돌봤다. 김지하 시인 가족과도 이때 알게 됐다. 김 시인의 부인 김영주 토지문화관 이사장 이야기다.
“김 총장님은 김동길 교수가 민청학련 사건에 엮이면서 민청학련 사건 가족들과도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우리 식구들도 많이 챙겨주셨다.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만났을 때에는 ‘김지하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김 시인 변호도 해주셨고. 원보(김 시인의 맏아들)한테 맛있는 것도 사주셨다. 원보가 막 태어났을 때에는 옷을 한보따리 사오시기도 했다. 나중에 내가 김 시인 옥바라지를 하면서 폐렴에 걸렸었다. 나는 그냥 지나가는 감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속 기침을 해대니까 총장님이 기침 소리가 심상치 않다며 병원에 가자 하셔서 끌려가다시피 따라갔다. 진찰 결과 폐렴이었다. 9일인가 입원을 했는데 입원기간 내내 세심하게 보살펴주셨다. 나한테만 그렇게 해주신 게 아니다. 민청학련 관련자들, 가족들 중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쌀도 사주시면서 소리 없이 도와주셨다.”
전국 각 대학의 유신반대 움직임이 최고조에 달하던 1973년 12월 7일 박정희 대통령은 돌연 유화조치를 내놓는다. 10월 2일부터 일부 학원에서 있었던 학원사태와 관련해 구속 학생 전원을 즉시 석방하고 학칙에 의해 처벌된 학생들에 대해서도 그 처벌을 백지화하는 조치였다. 이듬해 민청학련 사건 때도 그랬지만 박 대통령은 잡아들일 때는 물불 안 가리고 잡아들이더라도 이내 풀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박 대통령은 또 12월 개각을 하면서 DJ 납치, 최종길 교수 고문 치사 등으로 물의를 빚은 이후락 정보부장을 해임하고 후임으로 신직수 법무장관을 임명하면서 국면 전환 인사를 한다. 수장이 바뀌긴 했지만 중앙정보부의 권력 전횡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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