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단거리, 멀리뛰기 등에선 깍짓동만 한 일본인들이 우승을 휩쓸었다. 그런 종목은 체계적 훈련 없이 무턱대고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 대신 굴때장군 같은 조선인들은 장거리에서 단연 뛰어났다. 10마일(16.09km) 레이스에서 1, 2, 3위를 싹쓸이하더니, 25마일(40.23km)에서도 1, 2위에 올랐다.
문제는 입상자들의 직업이었다. 25마일 1, 2위 임일학 조창환과 10마일 우승자 최홍석은 인력거꾼, 10마일 2, 3위 김상동 김용만은 신문배달원이었다. 1929년 10월 제5회 조선신궁대회 마라톤 우승자 이성근도 인력거꾼이었다. 그는 2시간39분57초로 당시 조선최고기록을 세웠다. 그뿐인가. 그는 이듬해 제6회 대회에서도 2시간36분50초로 자신의 기록을 깨며 우승했다. 2위는 약 105m 뒤져 결승선에 닿은 남승룡.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동메달리스트인 그 남승룡이었다.
푸하하! 소가 웃을 일이었다. 참으로 옥생각에 푸접 없는 짓이었다. 이로써 인력거꾼 장거리 우승자는 사라졌다. 더이상 신문배달원 달리기 꿈나무는 나올 수 없게 됐다. 이성근도 1932년부터 백마육상구락부라는 클럽유니폼을 입고 대회에 참가했다.
도대체 한국근대육상은 언제 시작됐을까. 보통 1896년 5월 2일 영어학교의 화류회(운동회)를 그 첫발로 본다. 서울 동소문 밖 삼선평(현 삼선교 부근) 공터에서 300보, 600보 달리기, 공 던지기, 대포알 던지기(투포환), 멀리뛰기, 높이뛰기 등의 경주를 했다. 당시 한창 서양문명에 구쁘던 조선 사람들에겐 ‘얼씨구나! 별천지’였다. 난생 처음 듣도 보도 못한 경주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종목 이름도 ‘너무나 시적(詩的)’이었다. 소년단거리는 ‘어린 제비가 나는 것을 배울 때’라 해서 ‘연자학비(燕子學飛)’, 넓이뛰기는 ‘비어섬랑(飛魚閃浪)’이라 해서 ‘물고기가 물결 사이를 빠르게 뛰어오른 것’에 비유했다. 높이뛰기는 ‘큰 물고기가 높이 뛰어오르는’이라는 뜻의 ‘대어발호(大魚跋扈)’라 했다. 입상자들에겐 자명종, 회중시계, 수첩, 주머니칼, 연필, 물부리(담배파이프), 장갑, 은병, 명함갑, 서양먹통 등 값비싼 외국 제품들이 주어졌다.
최근 ‘한국육상경기 100년사’(832쪽·대한육상경기연맹)가 책으로 나왔다. 이제야 비로소 번듯한 한국육상의 족보 뼈대가 세워졌다. 육상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발자취가 오롯하다. 도끼날을 100년 동안 갈아 마침내 바늘을 만들었다. 그 바늘로 자갈밭에서 꽃우물을 파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반만년 뭉치고 다지어 꽃피운 ‘오래된 미래’다.
나는 던진다, 고로 두둥! 심장이 뛴다. 나는 펄쩍 뛰어오른다, 고로 자글자글 피가 끓는다. 나는 달린다, 고로 우렁우렁 난딱 살아있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에밀 자토벡).
‘육상이라는 이름의 민둥산/육상인이라는 이름의 나무들 덕분에/일백 년 동안 푸른 산으로 와짝 자랐다//산을 키워 온/권태하 김은배 남승룡 서윤복 손기정 함기용/최충식 한승철 주형결 백옥자 정봉수/반 백년 금강송/황영조 이봉주 김재룡 장재근 이진일 이진택/이영선/십 년생 이십 년생 어린 꿈나무들’ (서상택 ‘꿈꾸는 산’에서)
김화성 스포츠레저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