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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헌법개정’ 서명 열흘 만에 30만… 박정희 “즉각 중지하라”

입력 | 2013-06-27 03:00:00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56>개헌운동




1973년 11월 5일 서울 종로 YMCA에서 시국간담회를 하고 있는 재야인사들. 왼쪽에 서 있는 이가 함석헌, 바로 옆에 안경쓰고 앉은이가 지학순 주교,  그 옆이 이호철 소설가, 가운데 태극기 아래 서 있는 이가 김재준 목사. 오른쪽 아래부터 김지하, 계훈제, 법정 스님, 천관우. 동아일보DB

DJ가 납치됐다가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날인 1973년 8월 13일 김지하는 마산 병원에 들렀다 나온 뒤 마산항 부두에 서 있었다. 왜 갔는지는 기억에 없다고 했다. 갑자기 경찰관이 다가와 동행을 요구했다. 그는 경찰서에 와서야 잡혀온 까닭을 알았다고 한다. DJ가 돌아오자마자 전국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고 철도와 항만에서는 수상한 사람들을 조사했던 것이다. 김지하의 말이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지만, 나는 내심 박 정권의 두려움이 극에 달했구나 느꼈다. 바야흐로 반(反)유신운동의 적기(適期)가 다가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히 조사를 마치고 나온 그날 밤 그는 후배로부터 “미군 항공기가 납치범들을 위협해서 DJ가 풀려났다”는 소리도 들었다고 한다. 다시 그의 말이다.

“박 정권은 서서히 포위될 것이고 반유신 투쟁은 불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결연해졌다. 그런 마음 한쪽에 새로운 민중의 힘과 새로운 지식인들이 리더십을 세워 이 사회를 바꿔야 하는데 세상을 바꿀 새로운 생각과 세력이 그렇게 쉽게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1973년 10월 2일 서울대 문리대 ‘10·2 시위’와 관련해 한국의 어느 신문 방송도 즉시 보도하지 못했다. 동아일보의 경우에도 10월 3일자에 ‘문교부는 각 대학의 학생 처·과장들을 소집, 최근 대학생들의 움직임과 학생 지도 대책 등을 논의했다’는 내용의 모호한 기사를 실었을 뿐이었다.

“학생들의 시위현장에 갔던 사건 기자들은 학생들로부터 ‘기사는 한 줄도 못 쓰면서 취재는 뭣 하러 하느냐’는 비난을 듣게 됐다. 기자들은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만 했다.”(‘동아자유언론실천백서’)

10·2 시위 닷새 만인 10월 7일 동아일보 기자 50여 명은 “보도가치가 있는 기사를 지면에 다룰 것”을 요구하며 편집국에서 철야농성을 했다. 기자들이 신문제작에 항의해 벌인 첫 번째 집단행동이었다. 타사 기자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1973년 10월 19일부터 12월 초까지 경향신문 신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기독교방송 문화방송 등의 기자들이 철야농성을 벌이거나 기자총회를 열고 언론자유 수호를 결의했다.

11월 22일 한국일보 기자들은 사실보도를 다짐하는 ‘언론자유 확립 결의문’을 채택했고 11월 27일과 30일에는 조선 중앙일보 기자들이 결의문을 채택했으며 한국기자협회도 11월 29일 △객관적 사실을 보도하고 △내외의 부당한 제재를 배격하며 △1971년 5월에 채택했던 언론자유 수호행동강령을 준수할 것 등 3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12월 3일에는 동아일보 기자 369명이 기자총회를 열고 언론자유수호선언을 한다.

재야인사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1973년 11월 5일 계훈제 김재준 천관우 함석헌 김지하 이호철 법정 스님 등 15명은 서울 종로2가 YMCA 커피숍에서 ‘시국 선언’을 한다. 시국 선언을 하러 떠나던 날, 김지하의 회고다.

“아침에 대문 밖까지 나와 전송하는 아내에게 그날 있을 일을 간략히 얘기해 주었다. 아내는 무표정했다. 며칠 지나야 돌아올지도 모르고 몇 달 동안 구치소에 가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말도 했다. 아내는 역시 말이 없었다. 아내는 내가 안 보일 때까지 문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김지하는 “종로로 가는 내내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내 모습이 오래 잊혀지지 않았다”고 했다.

김재준 목사가 선언문을 낭독했고 내외신 기자들과의 기자회견도 끝났다. 연행을 선포하고 안내하는 종로경찰서 경찰관들을 따라 트럭에 올라 모두 종로경찰서로 갔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종로경찰서장이 직접 일행들을 면담했다. 김지하를 보더니 “비어 필화 사건 때 마산경찰서장을 하고 있어서 선생을 잘 안다”고도 했다. 이날은 함석헌 김재준 천관우 셋만 남고 모두 방면된다. 김지하는 서둘러 정릉 집으로 돌아왔다. 아내의 안도하는 표정이 느껴졌다.

그로부터 19일 뒤인 1973년 11월 24일에는 한국기독교협의회 주최로 천관우(언론계), 이문영(학계), 이태영(여성계), 안병무 고범서(신학계), 김재준 조향록 서광선(기독교계), 한승헌(법조계) 등 각계 대표 30명이 학원과 언론사찰 중지를 담은 ‘인권선언문’을 발표한다. 3일 뒤인 11월 27일 밤에는 서울 종로구 신문로 소재 새문안교회에서 대학생들이 시위를 하다 경찰에 연행됐고 28일엔 종로5가 소재 기독교회관 대강당에서 기독교 6개 교단과 한국기독교협의회가 주최한 연합구국기도회가 끝난 후 청년회 회원 20여 명이 시위를 하다 연행됐다.

그리고 마침내 12월 24일 유신체제에 대한 구체적 저항운동이 닻을 올리니 바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었다. 유신헌법을 바꾸자는 전 국민 운동이었다. 장준하 함석헌 김동길 천관우 계훈제 백기완 등 재야 인사들은 이날 오전 10시 YMCA에서 모임을 갖고, 각계 인사 30인의 서명 아래 ‘유신헌법개정 청원운동본부’를 만들어 이날부터 100만인 서명운동을 벌이기로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현행 헌법은 그 개정의 발의권이 사실상 대통령에게 속해있는 것이기 때문에 대통령에게 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100만인 청원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며 ①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의 서명자 30명 각자가 본부이며 ②민족의 성원이면 누구든지(대학생 연령층 이상) 참여할 수 있으며 ③연령과 시·도·군을 명기하여 개인 혹은 집단으로 운동본부 서명자 30명 중 누구에게나 보내주면 된다고 밝혔다.

이 운동을 주도한 이가 바로 ‘사상계’ 전 발행인 장준하였다. 헌법 개정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상황에서 당시 서명운동은 열흘 만에 30만 명이 서명할 정도로 호응이 컸다. 성탄절이었던 이튿날 12월 25일 서울 명동 대성당에서는 ‘노동자를 위한 미사’에 참례했던 신도 100여 명이 거리시위를 벌이려다 경찰의 제지로 해산되는 일까지 일어났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전개되자 박대통령이 “즉각 중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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