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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영, 예춘호 공화당 탈당… 박정희 정권 내부 균열

입력 | 2013-07-01 03:00:00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58>1974년 1월




공화당 정구영 총재(왼쪽)가 총재 시절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한 모습. 날짜 미상이다. 동아일보DB

재야의 유신헌법 개헌 서명운동은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운동을 시작한 지 1주일 만인 1974년 1월 1일 서명자는 5만 명을 넘어섰고 8일엔 10만 명을 넘어섰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이라 할 수 있는, 1970년대 중에서도 가장 뜨거웠던 한 해로 꼽히는 1974년이 밝았다. 74년은 우리 현대사에서 특히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특기할 만한 해다. 1월 긴급조치 1, 2호를 시작으로 이른바 ‘긴조 시대’가 열린 해가 74년이며 김지하를 포함해 수많은 민주화 인사가 대거 체포, 구속된 해가 74년이다.

박정희 대통령 역시 심상치 않은 한 해가 될 것임을 예감했는지 신년사를 통해 “유신과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무리와 착오가 없지는 않았음”을 인정하면서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보다 더 밀접한 일체감을 갖고 착오를 시정하는 데 결코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정국은 새해 벽두부터 요동쳤다. 1월 7일 공화당 초대 총재이자 당의장을 지낸 정구영(당시 78세)이 공화당 탈당 성명을 낸 것이다. 그는 3선 개헌 후 사실상 정계를 은퇴한 상황에서 당적은 가지고 있었는데 유신 체제에 대해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가 DJ 납치 소식을 접하고 희망을 접었다.

그는 7일 오전 서울 북아현동 자택에서 예춘호 전 사무총장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표하며 탈당 기자회견을 한다.

“오늘의 사태는 당원으로서 소신을 밝힐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마저 잃은 채 조국의 안위는 백척간두에 서가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므로 오랜 자책 끝에 당과 결별하기로 했다. 민주주의는 입법 사법 행정의 3권 분립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유신헌법은 이들 3권이 하나로 흡수된 삼권적(三權的) 유일체제다. 이 같은 비민주적이고 불법적인 권력의 전횡에 대해 공화당원으로서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재야가 벌이던 유신헌법 개헌 서명운동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도 “당연히 할 일을 하는 것”이라며 지지 의사를 표했다.

5·16군사정변 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민정 이양으로 가는 과정에서 63년 공화당을 창당하며 삼고초려 모셔온 사람이 바로 대쪽 변호사로 국민의 신망을 받고 있던 정 전 총재였다. 10여 년 전 박 정권을 일으키는 데 앞장선 그의 탈당은 박 정권에 대한 전면 부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탈당과 동시에 74년 11월 27일 재야세력이 총집결해 만든 범국민 비정치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 고문단에 추대된다.

정 전 총재가 탈당 선언을 한 7일 야당인 신민당 정무회의는 “민주 회복을 위해 개헌 투쟁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같은 날 이희승 이헌구 김광섭 안수길 이호철 백낙청 등 61명의 문인이 개헌 지지 문인성명을 낸다.

그리고 이튿날인 74년 1월 8일 오후 5시 유신헌법에 기반한 ‘대통령 긴급조치 1, 2호’가 선포된다. 이날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 현대사에서 역사적인 날이기도 하다. 이날을 기점으로 6년 뒤인 79년 10·26사태로 박 대통령이 시해되는 날까지 한국 사회는 말과 생각이 극도로 통제당하는 공포정치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 헌법에 대한 어떠한 부정, 반대, 왜곡, 비방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2호는 1호를 위반했을 경우 영장 없이 체포해, 새로 만든 비상군법회의에 넘겨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지만 70년대 중후반 한국 사회에서는 “헌법이 잘못됐다” “바꿔야 한다”는 말을 한 게 발각되는 날이면 바로 붙잡혀 최대 15년까지 징역을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술집에서 식당에서 정치 이야기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굳이 하고 싶으면 소곤소곤 귀엣말을 나눠야 했다. 혹시라도 속을 터놓았다가 상대방이 경찰에 고자질하면 어쩌나 하는 의심으로 조마조마해야 하는 시절이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인권침해 조치인 긴급조치는 박 대통령이 그만큼 유신에 집착했다고도 볼 수 있고 그만큼 당시 사회 분위기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긴급조치 1호 위반에 따른 첫 구속 대상자는 장준하와 백기완이었다. 두 사람은 ‘개헌 서명운동’을 벌이면서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를 비방한 혐의로 74년 1월 15일 오후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기소된 지 6일 만에 첫 공판을 받았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오후 각각 15년씩 징역이 선고됐다. 판사가 내린 형량은 검찰 구형량과 일치한 ‘정찰제’ 판결이었다.

긴급조치가 내려진 1월 8일 김지하는 서울 충무로를 지나다 라디오에서 소식을 듣고 귀가 번쩍 뜨인다. 장준하 백기완 등 개헌 서명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에 대해 체포령이 떨어졌다는 소식도 들렸다. 그는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아내에게 전화만 한 뒤 내설악을 거쳐 강릉에 있는 지인의 집으로 피신한다. 어쩌면 앞으로 다가올 일들은 이제껏 겪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지인의 집과 여관방을 전전했다. 어느 날 바닷가 여관방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1974년 1월’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기도 했다. 앞날에 대한 그의 불안과 울분이 녹아 있다. 시의 전문을 소개한다.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

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그 시간/다시 쳐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겁먹은 얼굴/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토록 어렵게/사랑을 시작했던 날/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두려움을 넘어/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바라보던 날 그날/그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

바람 찬 저 거리에도/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나올 꽃들의 잎새들의/언젠가는 터져 나올 그 함성을/못 믿는 이 마음을 죽음이라 부르자/아니면 믿어 의심치 않기에/두려워하는 두려워하는/저 모든 눈빛들을 죽음이라 부르자

아아 1974년 1월의 죽음을 두고/우리 그것을 배신이라 부르자/온몸을 흔들어/온몸을 흔들어/거절하자/네 손과/내 손에 남은 마지막/따뜻한 땀방울의 기억이/식을 때까지.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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