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창작극 ‘물탱크 정류장’ ★★★☆
옥탑방보다 더 응축된 공간으로서 물탱크에 대한 발칙한 상상력을 통해 이 시대 청춘의 불안과 꿈을 형상화한 창작극 ‘물탱크 정류장’. 남산예술센터 제공
서울 남산예술센터와 스튜디오 반이 공동 제작한 이 연극은 옥탑방에서 애인과 동거 중인 잡지사 직원 한세종(조승욱)이 겪은 현대판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를 펼친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조금씩 변방으로 밀려나는 것을 체감하던 세종은 어느 날 도심 건물 옥상에 방치된 40만 개의 물탱크를 연구한다는 괴짜 공학박사(정인겸)를 인터뷰하고 돌아오다 자신의 옥탑방 옆 물탱크를 연다. 그러자 그 물탱크에서 살아온 ‘물탱크 사나이’가 튀어나온다.
물탱크 사나이는 허름한 옷차림에 말도 어눌하고 자신에 대한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세종은 그의 독특한 삶에 현혹돼 물탱크를 자주 찾다가 모처럼 깊고 편안한 잠에 빠진다. 하룻밤을 지새우고 깨어난 세종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물탱크 사나이와 자신의 삶이 통째로 뒤바뀌어 있었던 것. 애인과 직장동료, 친구들은 모두 물탱크 사나이를 세종으로 받아들이고 진짜 세종은 물탱크에 사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결국 물탱크 속 폐인이 되어가던 세종은 옥탑방에 새로 이사 온 젊은 부부의 삶을 몰래 관찰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2의 물탱크 사나이가 된 세종이 또 다른 사람의 삶을 훔치려다 좌절하는 후반부의 이야기는 개연성이나 설득력이 떨어진다. 왜 세종이 앞서의 선배 물탱크 사나이와 달리 다른 사람의 삶을 훔치는 데 실패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는 데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빼앗는 것에 대한 죄의식조차 제대로 표현되질 못했다. 게다가 전반부에서 물탱크에 감춰진 비밀열쇠를 쥐고 있는 듯 보였던 괴짜 공학박사가 후반부에는 아예 실종돼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낼 여지조차 막아버렸다.
소설은 독자를 미궁에 빠뜨린 채 결말을 지어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극은 소설과 달리 관객에게 질문을 던질 줄 알아야 한다. “당신이 만일 세종처럼 삶을 통째로 도둑맞았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은둔할 것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삶을 훔칠 것인가.” 연극은 이런 질문은 버려둔 채 성급하고 빠른 답만 찾으려다가 길을 잃고 좌초하고 만다. 극 전후반의 대칭적 구조를 좀더 날 서게 벼려내면서 답이 아니라 질문에 충실하게 손질한다면 매력적인 작품으로 재탄생할 가능성이 큰 작품이다.
: : i : :
14일까지 서울 예장동 남산예술센터 드라마 센터. 1만5000∼2만5000원. 02-758-2150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