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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갓 출옥한 조영래에게 민주화 운동 사령탑 부탁

입력 | 2013-07-03 03:00:00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60>내란 선동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체포되기 직전 무렵에 집에서 찍은 사진. 외신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이다. 김지하 제공

1971년 11월 2일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6개월을 선고받은 조영래는 1973년 5월 21일 대전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한다.

김지하는 그해 가을 조영래와 만난다. 그리고 ‘민청학련’ 이야기를 꺼낸다. 그의 말이다.

“조영래를 만난 곳은 신촌 로터리 작은 찻집이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눈빛도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이때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몹시 부끄럽다. 한마디로 염치가 없었다. 방금 감옥에서 나온 사람에게 또다시 감옥 갈 일을 부탁했으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내 딴엔 열심히 일한답시고 그랬던 것인데, 그러나 그것이 조영래 아우에게 어떤 고통을 가져다주었는가? 이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어 7년여의 세월을 숨어 지내며 그중에 첫아들을 낳고 ‘전태일 평전’을 써냈으니, 나로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이때 김지하는 반(反)유신을 위한 전국적 학생조직의 필요성을 전하면서 조영래가 사령탑을 맡아줄 것을 권했다고 한다. 자신은 자금을 돕겠다면서 말이다.

이즈음 조영래와 자주 만났다는 송철원 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의 회고다.

“같은 동네인 갈현동에 살고 있어서 자주 만나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조영래는 체질상 술이 잘 받지 않아 주로 내가 마셨다. 담배만은 죽이 잘 맞아서 앉은 자리에서 둘 다 한 갑씩은 보통이었다. 나는 그때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묻지도 않았고 그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를 보고 뭔가 일을 꾸미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두 사람은 집 근처 술집에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조영래가 불쑥 “형님, 돈이 좀 필요한데요. 좀 많이요”라고 하는 것 아닌가. 다시 송 이사장의 말이다.

“나는 어디에 쓸 것이냐고는 묻지 않고 ‘언제 필요하냐’고만 물었다. 그러자 ‘당장은 아니고 내년에 필요한데 미리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나도 궁한 때였지만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출판사에서 청탁받아 놓고 있었던 취업용 영어책을 당장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면서 일본어에 능통한 조영래에게는 작은 일본어 영어 참고서를 번역하도록 했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는 식으로 이듬해 3월까지 뚝딱 책을 만들어 냈다. 그때 나온 송철원 조영래 공저(共著) ‘객관식 영어연습’이 그것이다(웃음).”

하지만 이 책은 인세(印稅) 지급이 늦어져 결국 조영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한다. 오히려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자 출판사만 수사기관으로부터 곤욕을 치렀다.

어떻든,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조영래는 학생 신분도 아니었고 이미 노출된 상태로 수사기관으로부터 주목받는 입장이라 민청학련의 중심에서는 비켜나 있었지만 이처럼 물심양면으로 후배들을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지하는 어느 날, 민청학련 자금으로 조영래에게 120만 원을 건넸다. 당시에는 제법 큰돈이었다. 지학순 주교가 마련해준 돈이었다. 김지하에 따르면 “지 주교에게는 돈이 누구에게 간다고 말하지 않았고, 조영래에게 건넬 때에도 누구로부터 받은 돈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무렵 김지하는 지 주교와 자주 시국을 상의했다. 어느 날 밤 두 사람은 청년학생이나 혁신 세력과 가톨릭이 연결만 확실하게 되면 파괴력이 강한 반유신 전선이 형성될 것인데 그 연결이 문제라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때 지 주교가 한숨 섞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결국 나로구나. 내 피를 마셔야만 가톨릭이 일어설 거야. 가톨릭이 일어서야 다른 종교와 시민들, 외국 여론이 일어서고… 자네, 각오는 돼 있지? 체포되거든 불어! 내가 구속돼야 해! 그래야 사제단도 주교단도 정신 차리고 수녀들 평신도회도 다 태도를 달리할 거야! 다시 고생 좀 하게. 나와 함께 한 번 더 고생을 해!”

1974년 1월로 접어들면서 민청학련 결성을 위한 이야기는 구체화됐다. 이철 전 의원의 회고(‘실록 민청학련’)다.

“74년 1월 초 유인태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후일 중앙정보부가 ‘민청학련 결성일’이라 억지 지칭한 1월 10일 모임이다. 지방까지 포함해 10명에 가까운 숫자가 모였다. 구체적인 준비와 역할 분담은 3월 6일 다시 유인태 집 모임에서였다. 여기서 결정된 사항은 ①투쟁의 기획, 연락은 서울에서 맡는다 ②이철이 행동총책을 맡는다 ③명칭은 사용하지 않는다 ④유인물은 서울에서 일괄 작성, 공급한다 ⑤각 대학별 예비 시위를 조직하여 4월 초 일제히 거사한다 등이었다. 화염병을 쓰자는 문제가 거론됐으나 대부분이 반대의사를 표명한 것으로 기억된다.”

이때만 해도 따로 단체 명칭을 사용하지 않기로 하지만 나중에 여러 이름들이 거론되다 결국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으로 결정된다고 한다. ‘청년’을 붙인 것은 대학생들에 한정되지 않고 전 계층적인 투쟁이 돼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뚜껑을 열어보니 참여는 저조했다. 3월 21일 첫 봉화라 할 수 있는 경북대 시위가 일어나지만 200여 명이 참여하는 데 그쳤고 그나마 공권력의 강경대응으로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서울에서는 3월 28일 서강대, 4월 1일 연세대에서 있었으나 서강대 역시 300여 명이 구내식당에서 대정부 결의문을 낭독하는 정도로 그쳤고 연세대는 채플 시간에 시국선언문을 낭독하다 주동 학생들이 연행되면서 역시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이대로 끝낼 것인가, 계속할 것인가 갈림길이었다. 여기에다 2선으로 빠져 장기전에 대비하려던 서중석이 잠깐 들른 고향 집에서 연행됐고, 관련 인물들이 하나둘씩 잡혀가고 있다는 비보가 날아들고 있었다. 정보가 이미 샜다는 판단이 섰다.

승부는 이미 끝난 것이라는 데에 누구도 이견을 달지 않았다. 그러나 내친걸음이었다. 싸우는 길 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다. 4월 3일, 계획대로 각 대학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날 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다.

주동자들은 모두 현상수배가 됐는데 현상금이 1인당 300만 원까지 뛰었다. 간첩 현상금이 30만 원인 시절이었다. 이들에게 붙여진 죄목은 대통령 긴급조치 4호 위반 외에도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것들이었다.

주동자들은 이내 검거됐다. 재판은 발언 저지, 경고, 휴정, 퇴정 명령, 항의 소동으로 뒤범벅이 됐다. 한 달 만에 심리를 끝낸 재판은 7월 9일 결심에 이르렀다. 검사는 8명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7월 13일 1심 선고재판 결과는 사형 7명, 무기징역 7명, 징역 20년 12명, 징역 15년 6명이라는 가히 천문학적 형량이었다. 법정에서 선고된 형량만을 합쳐도(무기, 사형 제외) 300년이 넘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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