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무르시 대통령 축출]軍, 親무르시 세력 대대적 숙청 나서
압둘 파타 알시시 이집트 국방장관은 3일 오후 9시(한국 시간 4일 오전 4시) 국영TV 연설에서 “국민과의 합의점을 찾지 못한 무르시 대통령의 권한을 박탈했다”고 발표했다.
군부는 무르시 대통령을 공화국수비대 건물에 억류했다가 국방부 청사로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군부는 또 무르시 대통령의 최측근인 무함마드 바디에 무슬림형제단 의장과 사아드 알카타트니 자유정의당 대표를 전격 체포했다.
알시시 장관의 기자회견장에는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 이집트 최고 종교 기관 알아즈하르의 수장인 아흐마드 알타이예브 대(大)이맘, 이집트 콥트교의 교황 타와드로스 2세 등이 참석했다. 이는 군부와 야권, 종교계가 무르시 축출과 새 정치 로드맵에 합의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군부의 실세로 떠오른 알시시 장관이 대통령 축출을 발표하자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과 대통령 궁 주변에 모인 수십만 명은 축포를 쏘고 환호를 질렀다. 이들은 “신은 위대하다” “이집트여 영원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상당수 시민은 4일 새벽까지 타흐리르 광장을 떠나지 않고 함께 모여 기쁨을 나눴다.
민주 절차를 거쳐 선출된 대통령을 1년 만에 군부가 나서 퇴진시킨 데 대해 이처럼 많은 시민이 환영하는 것은 무르시 대통령의 ‘이슬람 통치’에 대한 불만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다고 뉴욕타임스 등 외신은 전했다.
알시시 장관은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새 내각을 구성하겠다. 대선과 총선을 조기에 다시 치르고 청년 대표 등이 포함된 국가통합위원회를 만들겠다”며 “아들리 알만수르 헌법재판소 소장을 새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임명했다”고 말했다. 알만수르 소장은 이튿날인 4일 헌법재판소에서 전격 취임식을 가졌다.
정국은 군부와 야권의 합의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다. 많은 국민은 무르시 대통령이 취임 후 이슬람 색채를 강화한 헌법을 만든 것과 부정부패는 해소하지 못하고 경제까지 어려워진 상황에 큰 불만을 갖고 있다. 이집트 군부는 전통적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다. 한때 무르시 대통령과 동맹을 맺은 이슬람 수니파의 극보수 분파인 살라피그룹도 조기 선거를 지지한다며 무르시 대통령을 버렸다.
알렉산드리아 등 전국 각지에서는 무르시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슬람 세력과 반대하는 세속·자유주의 세력이 충돌해 하루 동안에만 최소 23명이 사망하는 등 4일간 50여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군부는 자신들이 직접 권력을 쥐고 흔들려 하기보다 이집트 경제를 살리기 위해 미국 및 서방 세력과 친한 엘바라데이 같은 인물을 내세울 것”이라며 “하지만 이집트 국민 사이에서 선거가 아닌 ‘광장을 통한 권력 교체’가 정당한 것처럼 인식될 수 있다”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3일 성명을 내고 “군부가 신속히 움직여 민주적으로 선출되는 정부에 모든 권한을 돌려줄 것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이집트에 제공되는 원조를 재검토하라고 관계 부처에 지시했다. 현재 미국은 이집트에 연간 15억 달러 규모의 원조를 주로 군수물자의 형태로 제공하고 있다.
차기 대통령 후보로는 독실한 이슬람 신자이면서 군부 내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무르시 대통령 축출을 주도한 알시시 장관, 엘바라데이 전 사무총장이 꼽힌다.
파리=이종훈·워싱턴=신석호 특파원·김기용 기자 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