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관 정치부 차장
공화당엔 ‘나이 트라우마’가 있다. 1992년 재선에 나선 공화당의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대통령(당시 67세)을 누르고 힐러리의 남편인 빌 클린턴이 당선됐을 때 그는 46세였다. 미국에서 40대 대통령의 탄생은 케네디 이후 30여 년 만이었다. 공화당은 2008, 2012년엔 당시 47세, 51세였던 버락 오바마에게 잇달아 패했다. 1947년 10월생인 힐러리는 2016년 대선 때는 69세가 된다. 공화당이 40, 50대 초반의 젊은 주자들을 띄우는 게 ‘역사적 반전’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사실 그의 목 주름살은 필자의 관심사가 아니다. 젊음을 내세워 늙음을 공격해대는 선거전략이 왠지 예전부터 영 마뜩지 않았다. 그때그때 시대정신에 따라 세대교체가 주요한 변수로 부상할 수 있음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힐러리의 나이와 경륜이 약(藥)이 될지 독(毒)이 될지, 미국서도 50, 60대의 반란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2008년 ‘흑인 대 여성’으로 맞붙은 민주당 경선은 사생결단의 혈전이었다. 힐러리 진영에선 오바마의 미들네임인 ‘후세인’을 집중 부각시키며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의회에서 꾸란을 들고 선서할 것이라는 주장까지 우호적인 언론과 인터넷매체를 통해 펼쳤을 정도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감정의 앙금을 뒤로한 채 각자 냉철한 계산에 의한 ‘전략적 선택’을 주고받는다. 힐러리는 자신의 무덤이 될지도 모르는 미지의 세계로 걸어 들어갔다. 현역 대통령이 재선 도전까지 하는 관행을 감안할 때 8년은 잊혀지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점을 고려했을 것이다.
그는 낮은 자세로 국무장관직에 임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직접 봤다는 정치권의 한 인사는 “힐러리는 혹시 함께 있는 사진이라도 찍힐까 우려해서인지 오바마 대통령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더라”고 전했다. 자신이 주연이 아닌 조연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는 것이다. 실제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며 눈에 띄게 해놓은 일이 딱히 없다는 지적도 많지만, 오바마의 외교 정책을 이행하고 전달하는 ‘그림자 역할’에 충실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그럼에도 ‘정치인’ 힐러리가 4년 내내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는 점은 흥미롭다.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오바마의 재선 가능성까지 고려한 신중한 처세로 보이지만, 퍼스트레이디로서 미국 권력의 최고 정점에 올라가 봤기에 오히려 가능했던 절제가 아닐까 싶다.
정용관 정치부 차장 yonga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