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철학하는 동네에서 ‘문제적 인간’은 부정적인 표현이라기보다 매혹적인 표현입니다. 그것은 독특한 운명 때문에 고통을 껴안고 살아가게 되는 선각자적 존재에게 붙이는 이름입니다. 평균인은 이해하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세계를 알고 있고 살고 있기 때문에 때때로 삶의 소중한 것을 제물로 내줘야 하는 운명의 인간이 바로 문제적 인간입니다.
불가에서 산 중의 산은 깨달음의 산, 원각산(圓覺山)이지요?
‘문제적 인간, 전두환’ 기사를 읽은 후에 내내 떠나지 않은 대목은 6·29선언이 그의 작품이라고 하는 설보다도, 앞으로는 노태우 욕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대목이었습니다. 나는 왜 그것이 의미 있는 씨앗이라고 느꼈을까요?
정주영 회장의 소 판 돈을 기억하시지요?
장롱 속에서 아버지의 소 판 돈을 훔쳐 나와 미친 듯이 돈을 벌었다던 그의 생애에서 무엇보다도 감동적이었던 대목은 소 1001마리와 함께 고향으로 귀환했을 때였습니다. 사실 아버지 장롱 속에서 길 떠나는 여비를 훔쳐 나온 일이 뭐 그리 큰 잘못이겠습니까? 그런데 그걸 마음속 가시로 여겨 자신이 나온 자리로 돌아가는 표지석으로 삼는 자는 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자존감의 사람이겠습니다.
당신의 ‘마음속 가시’는 어떤 건가요? 우리는 언제 우리가 돌아갈 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한 서점에 들어가려는데 외벽에 걸려 있는 문장이 가슴에 꽂힙니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마음속 가시는 시민의 목숨과 자유를 마음대로 짓밟은 것 아닐까요? 그래 놓고 자기 억울한 부분만 주먹을 불끈 쥐고 살았다면? 그랬던 이가 욕을 내려놓았다면 이제 그 힘으로 그 때문에 죽은 사람들 앞에 스스로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건 아닌지요. 믿음을 주고 권력을 준 한 사람의 배신으로 입은 깊은 상처 속에서 이제 숱한 생명들을 빼앗은 살생의 죄, 살인의 죄를 삼킬 수만은 없음을 성찰해야 하는 거 아닌지요.
사람들이 전두환 일가의 삶을 지켜보는 건 돈 몇 푼 받아내기 위한 것이 아닐 겁니다.
전두환, 그래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던 자가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일이 잦아졌다는 시점에서,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대면하며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하는지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