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훈 씨가 지난달 30일 여주 이포보 일대에서 열린 ‘은총이와 함께하는 희망나눔 2013 여주철인 3종경기대회’에서 휠체어에 탄 아들 은총 군과 함께 결승선을 향해 들어오고 있다(위). 박 씨는 첫 코스인 수영에서 은총 군을 태운 보트와 자신을 끈으로 연결해 1500m를 헤엄쳤다(가운데). 사이클 코스에서는 은총 군과 트레일러를 합쳐 100kg 무게를 끌고 40km를 달렸다(아래). 박 씨 부자는 3시간 25분 만에 코스를 완주했다. 여주=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여보, 우리 은총이가 이상해”
그는 평범한 은행원이었다. 10년 전 박 씨는 산부인과 분만실 앞에서 두 사람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0시가 조금 넘었을까. 아내 김여은 씨(35)의 비명과 함께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처음 세상에 나온 아들을 마주했다.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사랑이(태명)의 모습은 여느 신생아들과는 달랐다. 검붉은 아이였다. 작은 얼굴과 몸에는 포도주 빛 반점이 가득했다. “엄마 배 속에서 아이가 나오면 이런 모습인가요?” 간호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소아과 의사가 그를 따로 부르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의 혈관이 다 터진 것 같아요. 빨리 큰 병원으로 옮기세요.”
은총 군이 태어난 지 정확히 109일째 되는 날. 은행 업무 마감시간에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여보, 우리 은총이가 이상해!” 은총 군은 왼손을 떨며 경기(驚氣)를 일으키고 있었다. 마치 간질발작 같았다. 부부는 다시 병원으로 은총 군을 데려갔다. 은총 군은 보름 후에야 눈을 떴다. 박 씨와 아내는 그 후에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은총 군의 병명은 스터지베버증후군(뇌3차신경 혈관종증). 뇌혈관 기형으로 검붉은 반점(혈관종)이 나타나고 뇌가 돌처럼 굳어지는 현상(석회화)을 동반한다. 신생아 5만 명 중에 한 명꼴로 나타나는 희귀병이다. 스터지베버증후군으로 인해 또 다른 희귀병도 은총이를 찾아왔다. 다리 한쪽이 굵고 길어지는 클리펠트레노우네이베버증후군과 얼굴에 검붉은 반점과 뇌신경 이상을 동반하는 오타모반증후군7 등이 은총 군을 괴롭혔다.
은행원에서 신용불량자로
길어야 1년이라고 했다. 어느덧 은총 군의 첫돌이 다가왔다. 박 씨는 누구보다 멋진 돌잔치를 해줄 거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 무렵 은총 군의 경기가 더 심해졌다. 뇌수가 차올라 머리가 풍선처럼 부풀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작은 몸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다.
생일날 중환자실에 누운 은총 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 씨는 아내 몰래 건물 밖 휴게실로 나왔다. 그러고는 난생처음 목 놓아 울었다. 한참을 우는데 여자화장실 창문 밖으로 익숙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내도 울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날이었다.
신용을 잃자 친구와의 신뢰에도 금이 갔다. 친구를 만날 때면 박 씨는 은총 군 얘기를 꺼냈다. 친구들은 담배만 뻐끔뻐끔 피워댔다. 박 씨는 “소주 한잔 하고 싶어서 전화하면 돈을 빌려달라는 줄 알고 피하더라. 그러다 보니 차츰 친구에게 먼저 연락을 하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날이 갈수록 은총 군의 상태는 악화됐다. 은총이는 스터지베버증후군 합병증으로 찾아온 녹내장으로 오른쪽 시력을 거의 상실했다. 은총 군을 괴롭히는 경기는 잦아졌고 길게는 몇 시간까지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은총 군의 뇌는 점점 더 손상됐다. 부부는 은총 군을 안고 수많은 병원을 찾았지만 상처만 늘었다. 우리나라 소아신경외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권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아이를 낳은 걸) 그냥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세요.”
뇌 절반 떼내는 수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탓일까. 오랜 기다림 끝에 박 씨는 희망을 말하는 의사를 만났다. 당시 상계백병원 강훈철 교수는 “수술하면 좋아질 아이를 왜 이제 데리고 와서 고생시켰느냐”고 그를 다그쳤다. 수술비가 없어서 걱정하던 그에게 강 교수는 웃으며 “수술 시켜줄 테니 밤에 도망가라”며 웃었다.
은총 군은 2005년 3월 28일 황용순 교수의 집도하에 반나절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다. 황 교수는 “경기를 일으키는 오른쪽 뇌 때문에 왼쪽도 서서히 못쓰게 되는 상황이었다”며 “호전될 가능성은 60%로 봤다. 경기를 안 하는 것만으로도 성공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신경 기능을 회복하고 몸을 움직이는 기능이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뗀 첫발
하루에 10봉지 이상 먹어야 했던 경기 약을 이젠 먹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경제적인 어려움은 계속됐다. 은총 군의 뇌 수술비로 2000만 원이 넘게 들어갔고 재활치료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2008년 봄 아내가 은총 군과 서울의 병원에서 생활하는 동안 박 씨는 군산에서 일용직 막노동을 하면서 주말에만 가족들과 만났다. 김 씨는 남편에게 우울증이 찾아온 걸 알았지만 은총 군을 돌보는 것도 벅찼다.
박 씨에게 찾아온 마음의 병은 깊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까지 했다. 그는 “차를 타고 속력을 내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 그때 생명보험을 몇 개 들어뒀다. 마음껏 달리다 죽으면 모든 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절망을 향해 달리는 아빠의 ‘무모한 속도’를 줄여준 건 은총 군이었다. 걷는 건 물론이고 1년도 살지 못할 거라고 했던 은총 군이 2008년 4월 1일, 만우절에 거짓말처럼 걸었다. “여보, 은총이가 방금 걸음을 뗐어!” 아내가 보내준 동영상을 확인한 박 씨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어두웠던 그의 얼굴에는 오랜만에 미소가 번졌다.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세요
“남자 박지훈으로서는 바닥이었어요. 무능력하고 돈도 벌지 못하는 제 모습이 싫었어요. 그러던 중에 미국의 호이트 부자가 철인3종에 도전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뇌성마비 아들과 함께 달리는 모습을요. 무엇보다 은총이가 저와 달리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도전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2009년 가을 김 씨는 “내 마지막 도전”이라는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 결혼 후 처음으로 역할을 바꿨다. 김 씨가 일을 하기 시작했고 박 씨는 은총 군을 맡아 키우면서 철인3종을 준비했다. 새벽에 마라톤 연습을 하고 아내를 깨워 출근시키고, 은총 군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서는 사이클과 수영연습을 했다.
‘지선아 사랑해’의 저자 이지선 씨가 그에게 힘을 줬다. 전신 화상을 이겨내고 희망을 전도하는 이 씨는 직접 은총 군 가족을 찾아가 만났고 박 씨가 은총 군과 함께 철인3종에 도전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대한민국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세요’라는 메시지를 박 씨에게 보냈다. 박 씨는 지칠 때마다 그 메시지를 보면서 힘을 냈다. 은총 군 부자는 2010년 10월 16일 생애 첫 철인3종에 도전해 4시간20여 분 만에 완주했다. 1년 전 100kg이 넘었던 박 씨의 체중은 20kg이나 빠져 있었다.
이 씨의 소개로 가수 션이 지난해부터 박 씨와 철인3종에 함께했다. 2010년부터 매년 함께 뛰어온 10km 마라톤대회에서 션은 쌍둥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박 씨와 함께 달렸다. 지난달 30일 철인3종에서 2시간52분대에로 먼저 골인한 션은 은총 군 부자를 마중 나갔다.
“은총이 아빠가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마지막에 옆에서 같이 뛰어주지 않았다면 너무 힘들어서 걸었을 거라고. 누군가가 같이 뛰어준다는 건 큰 의미인 것 같아요. 멈추더라도 다시 뛸 수 있는 힘을 주니까요.”
‘은총이와 함께하는 희망나눔 2013 여주철인3종경기대회’에서는 총 583명이 은총 군과 함께 달렸다. 대회 참가비 3805만 원은 전액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위해 푸르메재단에 기부됐다. 은총 군과 같은 장애어린이는 국내에 등록된 수만 10만 명을 훌쩍 넘지만 전국에 어린이재활병원은 한 곳뿐이다. 푸르메재단은 올해 말 착공해 2015년 완공을 목표로 병원 건립기금을 조성하고 있다. 이 병원에서 하루 500명, 연간 15만 명의 장애어린이가 치료를 받게 된다.
푸르메재단 02-720-7002(대표번호)
여주=박민우 기자 min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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