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보장 원한 전범국 독일… 마르크貨까지 버려가며 단일화폐 유로의 産母가 돼또 한번의 경제기적을 이뤘다… 유로가 싫은 나라들 공통점은 무책임한 정부에 무능한 관료… 유로는 말한다, 연장 말고 목수를 탓하라고
김순덕 논설위원
긴축정책 반대 시위로 국정이 마비된 포르투갈에선 ‘왜 우리는 유로를 버려야 하는가’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다. 독일에선 “유로가 유럽을 갈라놓는다”며 석 달 전 경제학자 변호사 같은 지식인들이 창당한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이 9월 총선을 앞두고 세를 모은다. 심지어 독일의 막스플랑크 인구조사연구소는 “스페인 아일랜드 등 재정위기 국가에서 출산율이 떨어졌다”고 최근 발표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유로가 실패하면 유럽이 실패한다”며 남유럽 구제금융에 독일 국민의 세금을 내놨다. 하지만 1992년 ‘하나의 시장, 하나의 화폐’를 내건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나올 때부터 유로가 재앙을 부를 것이라는 경고가 적지 않았다. 엄마(통화정책)는 유럽연합(EU)에, 아빠(재정정책)는 회원국 정부에서 별거할 경우 아이(유로)가 중병(정부적자 국가채무 급증) 걸릴 위험성이 높다는 거다. 버는 돈보다 쓰는 돈이 더 많아 재정위기에 빠진 PIIGS(포르투갈 이탈리아 아일랜드 그리스 스페인) 국가가 딱 그런 경우다.
실제로 EU 집행위원회와 유럽의회 등이 몰려 있는 브뤼셀 한복판의 쉬망 로터리 주변은 EU빌딩 신축공사로 시끌벅적하다. 인구 110만 명의 브뤼셀에서 네 명 중 세 명은 외국 출신이고, 그중에 한 명은 EU 관련 인사라는 통계도 있다. EU에 고용된 회원국 고급 인력만 5만 명에다 EU를 상대로 한 로비회사 로펌 싱크탱크, 그리고 미디어 종사자까지 최소한 25만 명이 쓰는 돈으로 브뤼셀이 먹고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로는 절대로 깨지지 않는다고 내가 믿게 된 이유도 여기 있다. EU 공무원들의 평균 임금이 월 5000유로(약 750만 원), 벨기에 1인당 소득의 2배에 가깝다. 메르켈 총리 월급(1만6000유로)보다 많이 받는 고위직 4000명에게 EU의 안녕은 그들의 존엄이 걸린 문제다. 더구나 국민의 눈치를 보거나 책임질 일도 없어 관료 중에서도 팔자 좋은 유로크라트(eurocrat)라 불린다. 갑 중의 갑으로 살아온 이들 기득권 세력이 유로가 무너지는 꼴을 눈 뜨고 볼 리가 없다.
유로크라트와 유로엘리트가 브뤼셀에서 퍼뜨리는 소리가 “더 많은 유럽을(More Europe)”이다. 정치연합, 유럽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으로 가야 한다는 말도 EU가 더 많은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
뒷감당할 능력도 없으면서 마구 신용카드를 긁어버린 아빠들처럼, 무책임한 정부는 정치논리에 휘둘려 예산 낭비를 일삼았다. 그러니 국민 세금을 어떻게 걷어 제대로 쓰고 있는지 의심스러우면 유능한 유로크라트에 넘기라는 주장이다. 지난주 독일 베르텔스만 슈티프퉁 연구소는 “각국 정부가 브뤼셀로 외교를 넘기면 연 13억 유로, 국방을 넘기면 군인 임금에서만 연 90억 유로를 줄일 수 있다”고 발표해 EU를 편들었다.
지금은 귀태 취급을 받고 있지만 유로는 통일을 위해 독일이 마르크화를 포기한 값비싼 대가였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도 전 프랑스와 영국은 독일이 부강해져 또 전쟁 야욕을 품지 못하도록 독일 최강 무기인 마르크화를 박탈하기로 했고, 독일은 두 나라가 통일을 용인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호되게 통일 비용을 치른 독일은 2002년 마르크화보다 가치가 떨어지는 유로가 확산되면서 역전홈런 같은 기적을 창조해냈다. 2003년 시작한 구조개혁과의 시너지로 국가경쟁력이 폭발한 건 물론이다. 유로 덕에 싼 이자로 쏟아져 들어오는 돈을 정부는 부패로, 국민은 복지로 마구 삼켜 버린 남유럽 사람들이 이제 와서 유로를 탓하는 형국이다.
부패한 나라에선 제 나라 정부보다 EU와 그 뒤의 독일을 더 신뢰한다는 퓨리서치센터의 조사 결과가 있다. 태어나선 안 될 괴물이 과연 있을까. 우리는 자신의 맹점을 엉뚱한 데 투사하며 자위하고 싶은 게 아닐까.―브뤼셀에서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