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현대 ‘김환기 탄생 100주년’ 전
무제(1968년). 신문지가 함유한 기름기와 유채가 섞여 나타나는 다양한 효과를 살렸다. 갤러리 현대 제공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의 ‘Works on Paper: 김환기 탄생 100주년 기념’전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1913∼74)가 1967∼73년 뉴욕 체류 시절에 그린 종이 드로잉(oil on paper)을 집중 조명한 자리다. 올해 탄생 100주년 기념 행사 가운데 말년의 대표작인 점화(點畵)가 나오기까지 작가적 탐구의 궤적을 되짚어 보는 기회라는 점에서 일반 관객은 물론 미술사 연구자에게도 뜻 깊은 전시다.
낯선 땅에서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던 화가에게 재료에 들어가는 비용도 부담스러웠을 터다. 그때 폐품으로 버려진 신문지가 눈에 들어왔고 그는 삶의 역경을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삼았다. 갤러리 현대에선 그의 드로잉 100점을 모아 한국어와 영어 도록을 발간하고 이 중 드로잉 63점과 캔버스 작업 3점을 전시장에 선보였다. 30일까지 서울 전시를 마친 뒤 8월 22일∼9월 22일 광주시립미술관으로 순회한다. 02-2287-3500
무제(1970년). 미국에 머물던 김환기가 버려진 신문지를 모아 유채 캔버스 대신 활용한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말년의 점화가 나오기 전까지 고단한 현실에 맞서 치열하게 계속했던 실험적 노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갤러리 현대 제공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 여사가 생전에 한 말이다. 그 말대로 뉴욕 시절 김환기는 큰 작업에 들어가기 전 날마다 5∼10점씩 신문지 한지 갱지 포장지 등 온갖 종이에 밑그림을 그렸다. 빛과 질감, 형태와 구성이 제각각인 종이 작업은 그가 시도한 조형적 실험의 기본 설계도이자 이미지로 표현한 일기장이었다. 기초 체력을 다져 가듯 종이의 특성을 실험한 작업이 쌓여 가면서 동양적 정서가 스며든 고유한 점화의 미학이 태어난 것이다.
3개 층 전시 공간에 달항아리, 학 같은 전통 소재를 담은 전반기 작업부터 하늘의 별을 점으로 찍은 듯한 후기의 대작을 축소한 종이 드로잉까지 작품이 시기별로 분류돼 있다. 색채는 눈부시게 선명하고 그가 파고든 회화의 주제도 한눈에 볼 수 있다.
○ 모둠 식에서 특화된 전시로
이 같은 실험과 탐색의 여정을 거쳐 종이 작업이 새로운 예술세계의 전환점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두루뭉술한 모둠식 전시와 달리 작가의 종이작업을 특화한 전시가 빛을 발하는 대목이다.
김환기의 종이 드로잉은 사료적 가치와 함께 그 자체로도 완성도가 높다. 어쩌다 한번 미술시장에 나오면 수천만 원에서 1억 원대를 호가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갤러리 측에 따르면 상당수 소장자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출품한 것으로 판매용은 아니라고 밝혔다. 여기저기 흩어진 종이 드로잉을 한데 모으기까지 갤러리 현대 박명자 회장이 큰 힘을 쏟았다.
고미석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