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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窓]노량진 수몰 참사… “달력 석 장만 넘기면 고향 옌볜에 간다고 했는데…”

입력 | 2013-07-18 03:00:00

■ 첫 사망 확인 중국동포 박명춘씨 사연




서울 동작구 노량진 상수도관 공사 수몰사고 현장에서 15일 실종된 여섯 명의 지하터널 작업인부 중 중국동포 박명춘 씨의 시신이 17일 발견됐다. 흰 천에 덮인 박 씨의 시신을 구조대원들이 구급차로 옮기고 있다.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8월… 9월… 10월…. 이제 석 장만 더 넘기면 옌볜으로 돌아갈 수 있어.”

사흘 전까지만 해도 박명춘 씨(49·중국 동포)는 굳은살투성이인 손가락으로 달력을 가리키며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4년 9개월. 한국에서 죽을힘을 다해 일했다. 통장에는 약 2000만 원이 모였다. 이 정도면 중국 지린 성 옌볜에서 번듯한 아파트 한 채를 살 만했다. 하지만 박 씨는 아내와의 약속을 결국 지키지 못했다.

그는 15일 오전 7시 52분 서울 동작구 노량진 상수도관 수몰사고 현장에서 사고 약 39시간 만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시신은 수중에서 공사자재 등에 크게 부딪힌 듯 여기저기 상처가 나 처참했다. 이를 본 박 씨의 아내는 혼절했다.

숨진 박 씨의 아내와 사촌형 등 가족들은 오열했다. 옌볜이 고향인 박 씨는 숨지기 직전까지도 고단한 삶을 살았다. 5남매 중 넷째였지만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고향에서 하던 농사일은 돈벌이가 되지 않았다. 마흔이 됐을 즈음 스페인에서 1년간 고깃배를 탔다. 농사일보다는 훨씬 벌이가 쏠쏠했지만 언어의 장벽과 주위에서 쏟아지는 차별의 눈길은 그를 슬프게 했다. 그러다 2008년 한국에 왔다.

서울 대구 등지를 돌며 지하철 선로 작업, 암벽 굴착공사 현장 등에서 닥치는 대로 일했다. 운이 좋을 때는 한 달에 280만 원도 벌었지만 보통은 150만 원 정도였다. 60만 원 정도 하는 비행기표 값이 아까워 5년간 고향에도 가지 않았다. 원래 참을성이 많은 성격이었지만 자주 향수병에 시달렸다.

박 씨의 시신이 옮겨진 서울 보라매병원에는 실종된 터널작업 인부들을 위한 합동분향소가 차려질 예정이었다. 영안실이 모자랐지만 서울시내에 여섯 구의 시신을 동시에 안치할 마땅한 병원이 없었다. 화난 실종자 가족은 “차라리 사고현장에 냉동고 여섯 개를 놓고 장례를 치르겠다”며 서울시에서 나온 직원에게 소리 질렀다. 하지만 박 씨의 사촌형 박원춘 씨(50)는 그보다 다른 게 걱정이었다. 사촌동생의 영정으로 쓸 마땅한 사진이 없었다. 가진 것이라곤 제수씨(숨진 박 씨의 아내)의 스마트폰에 저장된 조그만 얼굴사진뿐이었다. “확대하면 깨져서 잘 안 보일텐데….” 그는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후 2시. 합동분향소가 고려대 구로병원으로 바뀌었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영문도 모른 박 씨의 가족들은 떠밀리듯 차에 탔다. 고려대 구로병원에 도착했지만 정작 시신은 언제 옮겨지는지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다. 박원춘 씨는 장례식장 현관에 쪼그려 앉아 사촌동생의 시신이 오길 하염없이 기다리다 밤늦게 도착한 시신을 수습했다.

이은택·곽도영 기자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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