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식 번역가·‘하찌의 육아일기’ 저자
하긴 수긍이 간다. 그날까지 오는 동안 웬만한 부모들은 탈진했을 것이다. 엄청난 사교육비에 비싼 대학등록금, 해외연수비, 취업준비 비용, 결혼자금까지 대느라고 노후자금을 몽땅 날린 부모도 많을 것이다. 이젠 다 끝났다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텐데 웬걸, 이젠 손자 손녀까지 키워 달라니.
그런데 외손자를 맡아 보니 ‘내 인생’이란 게 몰래 먹겠다고 감춰둔 케이크 조각처럼 따로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사적으로 밥 먹기를 거부하는 손자 녀석과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하고, 지칠 줄 모르고 날뛰는 녀석이 벽 모서리에 헤딩이라도 할까봐 눈을 못 떼고 전전긍긍하다 보면 우리가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내 말 잘 들어. 난 25년 동안 남들이 쓴 책만 100권 넘게 번역했어. 번역자 이름이 저자 밑에 깨알 같은 글씨로 찍혀 있었어도 난 그 책들이 나올 때마다 자식을 본 것처럼 뿌듯한 보람을 느꼈다고. 하지만 이번엔 외손자를 돌본 경험을 소재로 ‘하찌의 육아일기’를 직접 써서 출간하지 않았나. 못생겨도 내 새끼가 더 예쁘단 말이 실감나더군. 못생긴 자식이라도 또 낳고 싶어졌다네. 출판사로부터 내년엔 ‘하찌의 동화집’을 내자는 제의를 받았거든. 어떤가? 만년의 내 인생이 약간 활기를 띨 것 같지 않아? 이게 다 외손자 덕분이지 뭐야.
난 요즘 내 삶이 한결 더 보람차고 소중하게 느껴진다네. 전원생활 즐기며 여행 다니는 것도 좋겠지만, 그래봤자 뭐가 남겠나? 손자 봐준다고 해외여행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 서너 번 갈 때 한 번 가고, 못 간 나라들은 TV로 보면 되는 거지. 어차피 세상을 다 볼 순 없지 않은가. 다 본다고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고.
우리 딸은 얼마나 안심이 되겠나? 친정 엄마가 저 대신 아기를 잘 키워주고 있으니 걱정할 게 없지. 직장생활도 열심히 할 수 있으니 회사나 국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제 속으로 낳은 새끼를 엄마가 대신 키우느라 고생하는 거 보면서 내 딸이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몰라. 자기를 키워준 엄마에 대한 고마움도 새삼 깨닫는 것 같고. 부모 입장에서는 사실 그게 더 고맙고 기특해서, 손자 키우느라 진이 좀 빠져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 과외수업비를 아무리 쏟아 부어도 자식들이 그런 것까지 깨달아주진 않거든. 그런 깨달음은 부모 된 자의 솔선수범 없이는 얻어질 수 없다네. 부모가 한 대로 자식들도 따라 하지 않던가? 가끔 엉덩이에 뿔난 놈들도 있긴 하지만 말일세.
우리 사위는 어떠냐고? 그 친구는 더해요. 이런 멋진 아내와 훌륭한 장인 장모님을 만나 큰 복을 받았다면서, “제가 전생에 조국을 구했나 봐요”라며 장모 어깨를 주물러주는 친구야. 아부성 발언인 걸 감안하더라도 귀여운 데가 있잖나? 그래서 내가 장단을 맞춰 줬지. “난 전생에 우주를 구한 모양이네. 자네가 받은 큰 복 위에다 멋진 사위와 귀염둥이 외손자까지 덤으로 받았으니 말이야.” 그 사위에 그 장인이라고? 부인하지 않겠네.
이창식 번역가·‘하찌의 육아일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