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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에세이/이창식]외손자 맡아 키워보니

입력 | 2013-07-18 03:00:00


이창식 번역가·‘하찌의 육아일기’ 저자

맞벌이 부부가 대세인 세상이다. 취직 못하면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여자도 결혼하기 어렵다. 부모 등골 빼먹는다는 소리 들으며 힘들게 대학 마치고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 통과해 결혼까지 했는데, 막상 아기를 낳자 맡길 곳이 마땅찮다. 염치 불고하고 양가 부모님한테 부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렵사리 꺼낸 얘기에 “네 인생만 소중하냐? 내 인생도 소중하다”며 거절당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수긍이 간다. 그날까지 오는 동안 웬만한 부모들은 탈진했을 것이다. 엄청난 사교육비에 비싼 대학등록금, 해외연수비, 취업준비 비용, 결혼자금까지 대느라고 노후자금을 몽땅 날린 부모도 많을 것이다. 이젠 다 끝났다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 텐데 웬걸, 이젠 손자 손녀까지 키워 달라니.

그런데 외손자를 맡아 보니 ‘내 인생’이란 게 몰래 먹겠다고 감춰둔 케이크 조각처럼 따로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사적으로 밥 먹기를 거부하는 손자 녀석과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하고, 지칠 줄 모르고 날뛰는 녀석이 벽 모서리에 헤딩이라도 할까봐 눈을 못 떼고 전전긍긍하다 보면 우리가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1년 반쯤 지나고 나니 집사람이나 나나 지칠 대로 지쳤는지 교대로 몸 여기저기가 아팠다. 깨달음은 그런 멍한 상태에서 왔다. 내 삶이 이게 뭐냐? 우리 인생은 어디로 간 거지? 허구한 날 외손자 녀석과 씨름하다가. 주말엔 녀석에게 먹일 것과 딸 내외에게 제공할 반찬거리나 장만하며 보내는 게 고작이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이 있으면 약간의 휴식. 누군가는 우리에게 왜 그렇게 사느냐며 비웃기까지 했다. 나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야만 했다. 나 자신에게도 꼭 필요한 대답이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내 말 잘 들어. 난 25년 동안 남들이 쓴 책만 100권 넘게 번역했어. 번역자 이름이 저자 밑에 깨알 같은 글씨로 찍혀 있었어도 난 그 책들이 나올 때마다 자식을 본 것처럼 뿌듯한 보람을 느꼈다고. 하지만 이번엔 외손자를 돌본 경험을 소재로 ‘하찌의 육아일기’를 직접 써서 출간하지 않았나. 못생겨도 내 새끼가 더 예쁘단 말이 실감나더군. 못생긴 자식이라도 또 낳고 싶어졌다네. 출판사로부터 내년엔 ‘하찌의 동화집’을 내자는 제의를 받았거든. 어떤가? 만년의 내 인생이 약간 활기를 띨 것 같지 않아? 이게 다 외손자 덕분이지 뭐야.

난 요즘 내 삶이 한결 더 보람차고 소중하게 느껴진다네. 전원생활 즐기며 여행 다니는 것도 좋겠지만, 그래봤자 뭐가 남겠나? 손자 봐준다고 해외여행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 서너 번 갈 때 한 번 가고, 못 간 나라들은 TV로 보면 되는 거지. 어차피 세상을 다 볼 순 없지 않은가. 다 본다고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고.

우리 딸은 얼마나 안심이 되겠나? 친정 엄마가 저 대신 아기를 잘 키워주고 있으니 걱정할 게 없지. 직장생활도 열심히 할 수 있으니 회사나 국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야. 제 속으로 낳은 새끼를 엄마가 대신 키우느라 고생하는 거 보면서 내 딸이 얼마나 미안해하는지 몰라. 자기를 키워준 엄마에 대한 고마움도 새삼 깨닫는 것 같고. 부모 입장에서는 사실 그게 더 고맙고 기특해서, 손자 키우느라 진이 좀 빠져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란 생각이 들더군. 과외수업비를 아무리 쏟아 부어도 자식들이 그런 것까지 깨달아주진 않거든. 그런 깨달음은 부모 된 자의 솔선수범 없이는 얻어질 수 없다네. 부모가 한 대로 자식들도 따라 하지 않던가? 가끔 엉덩이에 뿔난 놈들도 있긴 하지만 말일세.

우리 사위는 어떠냐고? 그 친구는 더해요. 이런 멋진 아내와 훌륭한 장인 장모님을 만나 큰 복을 받았다면서, “제가 전생에 조국을 구했나 봐요”라며 장모 어깨를 주물러주는 친구야. 아부성 발언인 걸 감안하더라도 귀여운 데가 있잖나? 그래서 내가 장단을 맞춰 줬지. “난 전생에 우주를 구한 모양이네. 자네가 받은 큰 복 위에다 멋진 사위와 귀염둥이 외손자까지 덤으로 받았으니 말이야.” 그 사위에 그 장인이라고? 부인하지 않겠네.

외손자한테 푹 빠져 이따금 남편 조석도 뒷전이 되어버린 아내를 보면서 나는 그녀가 예쁘게 늙어간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도 소중하다”며 딸의 어려운 처지를 나 몰라라 하는 어미보다는, 어떤 때는 울고 싶다고 하면서도 날마다 외손자와 씨름하는 그녀가 훨씬 아름다워 보인다. 앞으로는 아내가 짜증을 부려도 웬만하면 다독거리고 도와줄 생각이다. 나도 짜증나면 못 참는 성질이라 마음먹은 대로 될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내의 인생이 내 인생이고, 내 딸의 인생도 내 인생이고, 우리 사위와 외손자 재영이의 인생도 틀림없는 내 인생이고, 그것들을 모두 합친 것이 다름 아닌 바로 나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내 인생이 정말 소중하다.

이창식 번역가·‘하찌의 육아일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