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이주향의 달콤쌉싸름한 철학]강아지와 조의(弔儀)

입력 | 2013-07-20 03:00:00


기쁨과 슬픔은 짝이지요? 꽃이 지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꽃을 가꿀 수 없듯 슬픔을 원하지 않으면 기쁨도 포기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의 기쁨을 누리는 자에게는 이별의 슬픔까지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중학생 조카가 어렸을 적부터 키우던 강아지 자연이를 잃었습니다. 이별의 슬픔에 얼마나 애간장이 녹았는지, 통곡하다 실신해버린 아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동생 내외는 자연이를 화장한 후에 선산에다 묻었답니다. 이별의 의식을 정중히 치른 거지요. 그래야 애가 선산도 자주 찾을 것 같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어머니는 감정이 복잡했나 봅니다. “세상에, 제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안 울던 녀석이…. 피를 주고 살을 준 할아버지, 할머니가 강아지보다 못한 세상이구나!”

피를 받고 살을 받아 태어나게 된 그 인연의 소중함을 알기에는 가족제도가 너무 빨리 해체되어 가고, 세상은 각박해만 갑니다. 그 각박한 세상을 뚫고 자기를 돌아보기까지 아이들은 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름다운 모자 한 쌍을 보았습니다. 이진강 변호사가 얼마 전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문상을 간 우리에게 그가 나직하게 들려준 고백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99세로 세상을 마치신 어머니를 염하며 “어머니,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길러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아픔이든, 사랑은 그렇게 우러나와 넘쳐흐를 때 자연스럽습니다.

현실적으로 강아지가 엄연한 가족인 집은 이제 흔합니다. 오죽하면 반려견이겠습니까? 반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가족 대우를 해주지 않는 집이 너무도 많습니다. 함께 살지 않으니 낯선 사람이고, 가끔 오셔도 준비된 자리가 없으니 불편한 사람일 뿐인 집이. 핵가족제 속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너무도 외롭습니다.

어쩌면 그 외로움은 삶이 그들에게 던지는 화두가 아닐까요? 평생 가족 울타리에서 살아서 아이들을 빼고는 자기 인생을 이야기할 수 없는 어르신들이, 나이 들어 강아지보다 못한 정서적 대우를 받으며 느낄 박탈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사랑이나 감정은 강요할 수 없는데. 사랑한 만큼 사랑을 기대하는 일, 그것은 사랑을 강요하고 통제하려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럴 때 찾아오는 것은 고립이고 고통입니다.

차라리 사람들이 강아지를 왜 좋아하는지 관찰해보십시오. 강아지는 거들먹거리지 않고, 화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는 기대하지 않고, 통제하려 하지 않고,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받아들입니다.

사랑이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화를 내면서 왜 내가 기대한 정답에 부응하지 않느냐고 폭발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정답이라 생각한 그것이 당신의 발목을 잡는 선입견이고 편견일 가능성이 높은데. 차라리 침묵하며 암탉이 알을 품듯 상황을 품어보십시오. 왜 ‘나’는 강아지보다 못한 가족인지. 그러면 외로움 속에서 새로운 답안을 만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릴케가 말했습니다. 생에서 우리가 답을 찾을 수 없는 건 지금 ‘나’의 삶이 답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암탉이 알을 품듯 물음을 품고 있으면 물음이 스스로 답을 줄 것입니다.

결혼한 자식을 잘 아는 이웃 정도로만 여기기, 그 대신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 만들기, 베란다에 예쁜 화단 하나 만들기, 배우고 싶었던 것 배우기, 자식을 위해 돈을 쓰지 말고 나를 위해, 친구를 위해 지갑을 열기 등등. 노을이 거기 있는 동안만 기쁘게 바라보십시오. 해가 지면 해를 떠나보내야 달과 별이 보입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