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조카가 어렸을 적부터 키우던 강아지 자연이를 잃었습니다. 이별의 슬픔에 얼마나 애간장이 녹았는지, 통곡하다 실신해버린 아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동생 내외는 자연이를 화장한 후에 선산에다 묻었답니다. 이별의 의식을 정중히 치른 거지요. 그래야 애가 선산도 자주 찾을 것 같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어머니는 감정이 복잡했나 봅니다. “세상에, 제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도 안 울던 녀석이…. 피를 주고 살을 준 할아버지, 할머니가 강아지보다 못한 세상이구나!”
피를 받고 살을 받아 태어나게 된 그 인연의 소중함을 알기에는 가족제도가 너무 빨리 해체되어 가고, 세상은 각박해만 갑니다. 그 각박한 세상을 뚫고 자기를 돌아보기까지 아이들은 시간이 많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아름다운 모자 한 쌍을 보았습니다. 이진강 변호사가 얼마 전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문상을 간 우리에게 그가 나직하게 들려준 고백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99세로 세상을 마치신 어머니를 염하며 “어머니,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길러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아픔이든, 사랑은 그렇게 우러나와 넘쳐흐를 때 자연스럽습니다.
어쩌면 그 외로움은 삶이 그들에게 던지는 화두가 아닐까요? 평생 가족 울타리에서 살아서 아이들을 빼고는 자기 인생을 이야기할 수 없는 어르신들이, 나이 들어 강아지보다 못한 정서적 대우를 받으며 느낄 박탈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사랑이나 감정은 강요할 수 없는데. 사랑한 만큼 사랑을 기대하는 일, 그것은 사랑을 강요하고 통제하려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럴 때 찾아오는 것은 고립이고 고통입니다.
차라리 사람들이 강아지를 왜 좋아하는지 관찰해보십시오. 강아지는 거들먹거리지 않고, 화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는 기대하지 않고, 통제하려 하지 않고,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받아들입니다.
사랑이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을 때 화를 내면서 왜 내가 기대한 정답에 부응하지 않느냐고 폭발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정답이라 생각한 그것이 당신의 발목을 잡는 선입견이고 편견일 가능성이 높은데. 차라리 침묵하며 암탉이 알을 품듯 상황을 품어보십시오. 왜 ‘나’는 강아지보다 못한 가족인지. 그러면 외로움 속에서 새로운 답안을 만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릴케가 말했습니다. 생에서 우리가 답을 찾을 수 없는 건 지금 ‘나’의 삶이 답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암탉이 알을 품듯 물음을 품고 있으면 물음이 스스로 답을 줄 것입니다.
결혼한 자식을 잘 아는 이웃 정도로만 여기기, 그 대신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 만들기, 베란다에 예쁜 화단 하나 만들기, 배우고 싶었던 것 배우기, 자식을 위해 돈을 쓰지 말고 나를 위해, 친구를 위해 지갑을 열기 등등. 노을이 거기 있는 동안만 기쁘게 바라보십시오. 해가 지면 해를 떠나보내야 달과 별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