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울산공장 유일한 ‘3부자 직원가족’ 권헌수·동환·동균 씨 이야기
17일 울산 남구 고사동 SK에너지 울산CLX에서 아버지 권헌수 씨(오른쪽)가 1982년 자신이 처음 입사했을 때 근무하던 곳을 두 아들 동환(가운데), 동균 씨에게 가리켜 보이고 있다. 동환 씨는 2009년, 동균 씨는 지난해 각각 이 회사에 입사해 아버지 뒤를 따르고 있다. 울산=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출하1팀이죠? 유조선에 송유관 연결 다 끝난 거 맞죠? 펌프 작동하겠습니다.”
전화 속 상대방은 다시 한 번 “준비가 끝났다”고 확인해 줬다. 펌프만 작동시키면 슬러리 오일(매우 뻑뻑한 상태의 공업용 석유제품)이 송유관을 타고 유조선으로 전달될 것이다. 하지만 펌프 작동 버튼을 누르자 기계에서 평소 듣지 못했던 굉음이 터졌다. 곧이어 시커먼 기름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송유관이 막혀 기름이 흐르지 못하고 역류한 거다.
시커먼 기름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겨우 펌프를 멈췄다. 그때 상황실에서 뛰어나온 선배 직원이 외쳤다. “무슨 일이냐. 빨리 아버지께 전화해 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분명히 준비를 끝냈다는 출하1팀의 말을 들었는데, 아버지나 내가 일 처리를 잘못한 걸까. 권동환 씨(29·SK에너지 No.2 FCC 생산1팀)는 같은 회사 석유출하1팀장인 아버지 권헌수 씨(56)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권헌수 씨가 직원들에게 무전으로 작업 내용을 전파하고 있다. 권 씨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최종 제품들이 배에 실려 전국 각지로 배송될 수 있도록 하는 석유출하1팀에 근무한다.
“그때 이후 회사 안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지냅니다. 한 명이 잘못하면 가족 전체가 욕을 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요.”
작년부터 같은 공장에서 함께 근무하는 둘째 아들 동균 씨(25·SK종합화학 올레핀 생산1팀)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동균 씨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작업장에서 만나는 선배마다 깍듯이 ‘배꼽인사’를 하고 다닌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아버지와 형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아버지의 푸른 작업복
20여 년 전, 어린 두 아들에게 매일 푸른 작업복을 입고 출근하는 아버지는 멋졌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전국 어디든 있는 SK 주유소가 모두 아버지 것인 줄 알았다.
고등학교 땐 회사 일에만 신경을 쓰고 집에는 잘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컴컴한 새벽에도 회사 전화를 받고 뛰어나갈 때도 있었다. 저녁엔 어김없이 술에 취해 들어왔고 나중에는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적지 않았다.
아버지 헌수 씨는 당시를 가장 힘든 때로 회상했다. “노사분규가 심할 때였어요. 강성 노조가 들어서면서 사원들도 두 패로 나뉘었을 때였거든요.”
관리직이었던 헌수 씨는 자신도 노조원이면서 다른 노조원들에게 회사의 입장을 설득해야 했다. 술자리가 잦아지고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아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얘기였다.
두 아들은 그렇게 다른 인생을 준비했다.
3부자(父子) 직원의 두 아들 동환(왼쪽), 동균 씨가 각자의 작업장에서 송유관 밸브를 점검하고 있다. 동환 씨는 휘발유 등 석유 제품을 생산하는 공정에, 동균 씨는 에틸렌 등 고분자 화합물을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한다.
머리 아닌 몸으로 들은 아버지 말씀
동환 씨는 뚝심 있게 자신의 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학점은 4.5 만점에 3.9점을 받을 정도로 독하게 공부했다. 토익 점수가 전교 10등 안에 들 경우 학교에서 보내주는 해외 어학연수도 세 번이나 다녀왔다. 졸업을 앞두고는 유명 종합병원 근무 경력이 있어야 강사로 시작하기 수월하다는 정보를 듣고 삼성서울병원 계약직 물리치료사에 지원해 단번에 합격했다.
출근할 날을 기다리고 있던 동환 씨에게 헌수 씨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아버지랑 같은 회사 다녀보는 게 어떻겠냐.”
헌수 씨는 차분하게 아들을 설득해 나갔다. 아버지가 아들을 설득한 건 1995년 이후 사실상 처음으로 대규모 공채가 실시된다는 점이었다. 외환위기(IMF) 여파로 10년 가까이 신입사원 채용은 가뭄에 콩 나듯 이뤄졌다. ‘모집 인원 ○○명’은 사실상 14년 만에 처음이었다. 그만큼 큰아들이 입사했을 때 성장할 수 있는 길도 넓고 탄탄할 거라 생각했다.
▼다른 목표에 대한 미련? 나의 길이라 생각하고 새 꿈 꾸죠▼
성격도 다르고 꿈 꿨던 미래도 달랐지만 권헌수 씨(가운데)의 두 아들 동환(왼쪽) 동균 씨는 지금 아버지의 뒤를 따라 SK에너지 울산 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두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새로운 꿈을 만들어 나가고 있어 지금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설득을 받아들인 동환 씨는 SK 공채에 지원했다. 이때까지도 속마음은 달랐다. 무엇보다 강단에 서겠다는 꿈이 있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블루칼라’보다는 병원에서 일하는 ‘화이트칼라’가 더 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동환 씨는 입사 시험을 본 후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서울로 올라와 병원 근무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겪은 두어 달 병원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기계보다는 사람과 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아픈 환자들이었다. 하루가 끝나면 기(氣)를 다 빼앗긴 느낌이었다. 친구 하나 없는 타지에서의 생활은 외향적 성격이었던 동환 씨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비정규직으로 동료들과 경쟁하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중압감도 시간이 지날수록 어깨를 짓눌렀다. 아버지의 설득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험한 아들 동환 씨는 다음해 봄 고향으로 내려와 SK 사원증을 목에 걸었다.
다른 성격, 같은 옷
아버지의 눈은 동환씨보다 네살 어린 동균 씨에게 향했다. 에너지와 자신감이 넘치는 첫째 아들과 달리 둘째가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했던 아버지는 동환 씨에게 했던 것처럼 입사를 강하게 권유하지 않았다.
‘이미 첫째가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둘째까지 회사에서 받아 주겠느냐’는 생각도 들었다. 동균 씨도 자신은 없었다. “워낙 큰 회사여서 내가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처럼 느껴졌어요.”
동균 씨의 꿈은 형에 비해 소박했다. 패밀리레스토랑 점장. 대학 졸업을 1년 앞둔 3학년 때 세계대구육상경기대회 홍보대사부터 한국문화관광외교대사까지 5, 6개의 홍보대사와 자원봉사 활동을 하면서 “내 적성은 서비스업종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가만히 동균 씨의 얘기를 듣고 있던 아버지 헌수 씨가 웃었다.
“저는 동균이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어요.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내성적인 아이인 줄만 알았죠. 집에 있을 때는 방에서 게임과 만화책에 파묻혀 살던 아이였는데요.”
아버지는 어떻게든 둘째도 자신과 같은 길을 걷게 하고 싶었다.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아버지와 동생에게 동기를 부여한 건 형이었다.
“동균아, 지원해라. 너 할 수 있다. 내가 반드시 너 합격시킨다.”
그날부터 ‘족집게 과외’를 시작했다. 자기소개서에 적을 수 있도록 회사의 구체적 업무 내용과 사내 분위기를 꼼꼼히 알려줬다. 인성·적성검사를 위한 수험서를 콕 집어 골라주는 일도 형의 몫이었다. “토론을 할 때는 절대로 상대방의 말을 자르지 마라”는 등 실무전형 노하우 전수도 빼놓지 않았다.
형의 노하우를 전수받은 동생이 서류와 필기 전형을 파죽지세로 통과하자 아버지의 의심도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최종 면접을 앞두고 아버지는 모의 면접관으로 변신했다. “보건학과를 나와서 왜 석유화학회사에 지원했나?” 같은 질문들을 아들에게 날렸다. 모의 면접관 아버지의 질문을 아들은 실제 면접에서도 그대로 받았다. 동균 씨도 지난해 아버지, 형과 똑같은 작업복을 입을 수 있게 됐다.
소박한 일상이 가족의 행복
석유출하1팀에 근무하는 권헌수 씨는 작업 한 과정 한 과정에 세심히 공을 들인다. 안전 사고를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손을 거쳐 전국으로 배송되는 완제품들에 두 아들의 땀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울산=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아버지의 권유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은 두 사람. “지금이 행복하다”고 입을 모으지만 하고 싶었던 일에 미련이 남지는 않았을까. 큰형 동환 씨에게 먼저 물었다.
“여기서도 가르칠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미련은 없습니다.”
동환 씨는 수시로 이뤄지는 해외 기술 이전을 얘기했다. 국내 건설사가 해외에 석유화학 공장을 지으면 현지 공장에 여러 노하우를 전하는 기회가 많다. 이 과정에서 현장 근무 경력이 있으면서 영어 실력도 좋은 기술자를 반드시 참여시키는데 이때 기술을 가르치는 게 동환 씨의 새로운 꿈이 됐다는 것이다.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한 덕에 동환 씨는 회사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입사 1년이 채 안 되는 동생은 같은 질문에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다”라는 대답이 먼저 돌아왔다.
“하지만 확신이 없이 막연히 동경했던 패밀리레스토랑 일과는 달리 지금의 삶에는 확신이 있어요. 지금은 아버지, 형과 나의 길이 맞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하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저도 이 울타리 안에서 또 다른 목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헌수 씨는 잠시 눈을 감았다 천천히 떴다. “지금 내가 이보다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도 가정에서 회사에서 후회 없는 삶을 함께 살아갔으면 한다는 헌수 씨의 마지막 바람은 소박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하지 못한 ‘표현’을 더 많이 하고 싶습니다. 며느리도 생겼으니 함께 외식도 자주 하고 이야기도 더 많이 나누는 게 유일한 바람이죠.”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