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천대 길병원 ‘저개발국 심장병 환자 수술’ 300번째의 기적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왼쪽)이 19일 무료 심장병 수술을 받은 스레이 누 양의 상태를 살피고 있다. 스레이 양은 가천대 길병원과 인천시가 공동 진행하는 ‘저개발국 심장병 어린이 초청 수술’ 사업의 300번째 수혜자다. 오른쪽은 스레이 양의 어머니 프롬 사문 씨. 인천=유근형 기자 noel@donga.com
수술이 필요했지만 꿈을 꾸지 못했다. 스레이 양의 아버지는 가난한 소작농.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논밭에서 일을 해 가족의 끼니를 챙겨야 한다. 설상가상 스레이 양의 오빠는 만성 장염을 앓았다. 엄마는 아들까지 건사하느라 밖에 나가 돈을 벌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다 보니 병세는 갈수록 심해졌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가빴다. 얼굴이 자주 질리고 입술이 파래졌다. 뇌로 산소가 잘 공급되지 않아 쓰러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열이 나면 손톱에 피가 몰려 검푸른 색으로 변하는 청색증이 심해졌다. 여섯 살이 되던 해, 첫 등굣길에서도 숨이 차 쓰러졌다. 정상적으로 학업을 이어가기 어려웠다. 엄마는 학교에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딸은 고집을 부렸다. 잦은 휴학과 유급 속에서도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상황은 누가 봐도 오래가기 힘들어 보였다.
의료진은 스레이 양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수술을 받지 않으면 20에서 30세 사이에 숨질 가능성이 높았다. 최덕영 가천대 심장소아과 교수는 “캄보디아 시골 마을에 사는 환자가 한국 의료진에게 발견된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말했다. 스레이 양은 가천대 길병원과 인천시가 공동 진행하는 ‘저개발국가 심장병 환자 초청 수술’의 300번째 주인공으로 선정됐다.
심장병 환자 초청 사업은 1991년 시작됐다. 이길여 가천길재단 회장이 한국여자의사회 의료봉사단 일원으로 베트남을 방문하면서였다. 현지에서 만난 20대 여성 도티늉 씨는 오랜 투병으로 중년 여성처럼 늙어 보였다. 이 회장은 그를 무조건 한국으로 데려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살린 생명이 지금까지 300명에 이르렀다.
이 회장은 19일 본보 기자와 만나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부부가 1983년 한국을 방문했다가 귀국길에 한국 어린이 2명을 데려가 심장 수술을 해준 장면을 마음속에 항상 품었다. 세계로부터 받았던 따뜻한 마음을 이제는 우리가 세계로 돌려줄 때”라고 말했다.
스레이 양은 18일 인천 가천대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하고 중환자실에서 집중 관리를 받았다. 이튿날에는 일반 병동에 갈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 19일 스레이 양의 손을 잡은 이 회장은 “가슴에 상처가 있어도 ‘이제 뛸 수 있어서 좋아요’라고 했던 수많은 환자들이 떠오른다. 새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마다 ‘아! 이래서 내가 의사가 됐어’라는 감격을 느낀다. 오늘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인천=유근형 기자 noe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