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장석주(1955∼)
비굴했다,
평생을
손발 빌며 살았다.
빌어서 삶을 구하느라
지문이 다 닳았다.
끝끝내 벗지 못하는
이 남루!
벽에 앉아 앞발을 싹싹 비비고 있는 파리. 발바닥에 들러붙은 이물을 비벼서 터는 중이시다. 파리는 발바닥으로 냄새와 맛을 느낀다. 그래서 발바닥을 말끔한 상태로 유지하는 게 파리한테는 중요한 일. 그렇거나 말거나 손발이 닳도록 비는 것 같은 그 행태로 인해 파리는 ‘비는 자’, 그러니까 ‘비굴한 자’의 대명사가 돼버렸다. 누군가의 인생을 파리 같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잔인하고 차가운 마음에 만정이 떨어지리라.
‘평생 비굴하게 산 사람’의 세 유형. 첫 번째, ‘내가 좀 비굴했지만, 열심히 살았다. 그래서 처자식 고생 안 시켰고, 늘그막에 남한테 아쉬운 말 안 하고 산다. 난 잘 살았다!’ 두 번째, ‘난 잘 못 산 거 같다. 열심히 살아서 기러기아빠도 해 봤지만, 가족의 정도 모르고, 황혼에 이혼도 당했다. 지문이 닳도록 비굴하게 산 끝이 비참하다.’ 세 번째, ‘뿌듯하지도 비참하지도 않다. 그런데 왠지 쓸쓸하고 남루하고 허망하다.’
“좀 비굴하면 세상 살기 얼마나 편한데요”라던 내 어린 친구여, 셋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다면, 부디 첫 번째 유형에 속하게 되시기를!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