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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균의 우울증 이기기]아이들에게 ‘결핍’을 겪게 해야 하는 이유

입력 | 2013-07-23 03:00:00


류인균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장 약대 석좌교수

진료실에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 중 하나는 자녀를 생각하며 부모가 안타까워 흘리는 진한 눈물을 볼 때다. 인간의 성장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과정인지 모른다. 자녀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보며 이를 함께 감내해야 하는 부모의 고통도 자식의 고통 못지않다. 오죽하면 인생에서 위기가 두 번 찾아오는데, 자신이 사춘기일 때와 자녀가 사춘기일 때라는 말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러한 고비 고비를 잘 넘기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30대 초반의 A 씨 부모는 둘 다 전문직이었다. 부모가 바쁘다 보니 어렸을 적 할머니 손에서 키워졌다. 조부모는 손자가 귀하기도 하고, 혼내거나 엄하게 키우면 아들 며느리에게 원망을 들을까 싶어 오냐오냐 키웠다. 부모 역시 아이를 돌보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자식에게 무조건 잘해 주려 애썼다. 공부를 별로 강요하지도 않았다. A 씨는 특별한 어려움 없이 대학에 진학했지만 문제는 군대에서였다. 부적응으로 심한 우울증을 겪으며 자살까지 시도했다. 그래도 무사히 고비를 넘기고 취업을 했는데, 이번에는 직장 내 부적응이 문제였다. 늦게까지 야근을 해야 하는 것도, 동기들끼리의 경쟁도, 상사의 타박도 견디기 힘들었다. A 씨는 결국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후 집에서 게임만 하면서 지내는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는 그를 위해 자신들이 소유한 빌딩에 당구장을 열어 주었는데 A 씨는 이마저도 힘들어했다. 그리고 결국 부모와 함께 병원을 찾은 것이다. 진료실에서도 땅만 쳐다보고 있는 자식을 바라보며 부모는 눈물을 흘렸다. 물론 그의 고통은 부모 탓만도 아니고 조부모 탓도 아니며 본인 탓만도 아니다. 이유를 찾으려면 만 가지 이상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A 씨 사례는 많은 부모들에게 내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준다. 마냥 밝게 키워야 할까, 아니면 일부러 어려운 일들도 시키며 극복하도록 해야 할까. 이 질문에 해답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실험결과가 하나 있다.

중국 베이징대와 톈진 정신의학연구소에서 발표한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생후 28∼55일(쥐에게는 청소년기)의 쥐를 대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가벼운 스트레스’를 반복적으로 주었더니 다 자랐을 때 우울증에 잘 걸리지 않도록 돕는, 이른바 ‘회복 탄성력’이 증가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이 쥐들은 성인기에 예측할 수 없는 만성 스트레스가 주어졌을 때에도 잘 견뎠다고 한다. 이는 고위 인지 기능을 담당하는 전전두엽 뇌세포들의 변화와 관계가 있었다.

근육에 무리를 가하면 인대가 늘어나거나 파열하지만 근육을 전혀 사용하지 않을 경우에는 근위축이 일어난다. 근육량을 늘리는 적절한 무게의 아령 운동처럼 적절한 스트레스는 도리어 정신근육 기능을 향상시킨다. 이러한 적절한 스트레스를 한스 셀리에 박사는 ‘유스트레스(eustress)’라며 ‘디스트레스(distress·과도한 스트레스)’와 구분하였다. 적절한 스트레스는 청소년기의 정신적 성장에도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어쩌면 A 씨에게는 세상 모든 것이 그저 편했는지 모른다. 말하기만 하면 뭐든지 이루어지는 경험이 많았던 그에게는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는 세상’이 낯설었던 것은 아닐까.

스위스 제네바대 의대 명예교수이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앙드레 헤이널은 “역경이나 부족, 박탈의 경험 등이 있어야 창조력이 길러질 수 있다”고도 한다. 실제로 알렉산더대왕, 처칠,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 세계적 지도자들은 의외로 부모를 어린 시절에 잃은 고아였다.

스위스 내과 의사인 폴 투르니에는 “역경이 없으면 이를 극복하는 창조력, 문제 해결 능력은 배양될 수가 없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역경에 처한 아이가 이를 극복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누군가가 ‘사랑’으로 그를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A 씨처럼 무력감과 자괴감에 빠져 부모 둥지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는 성인 자녀의 경우 사회에서 적응해 나갈 에너지나 자원이 부족한 상황이므로 A 씨에게 비난이나 책망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에, 마치 처음 아령 운동을 시작하는 것과 같이 감당할 만한 작은 스트레스에 노출시키는 것부터 시작하여 점차 스트레스 ‘무게’를 서서히 늘려 나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경제적 능력이 있는 부모가 많아서인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요즘 시대에는 A 씨 같은 자녀를 가진 집이 주변에도 많이 있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인디언 속담처럼 한두 가지 요인으로 아이가 잘못되거나 또는 무사히 잘 자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인간의 성장을 돕고 지켜보기란 정말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류인균 이화여대 뇌융합과학연구원장 약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