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前대통령 회의록 삭제 지시 의혹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지만 상자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국가기록원 대통령기록관에 ‘사초(史草)’가 없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터지면서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지원(e-知園) 시스템에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삭제할 것을 지시했다는 취지의 조명균 전 대통령안보정책비서관 검찰 진술까지 전해지면서 이번 사건은 헌정 사상 초유의 ‘사초 게이트’로 비화하는 양상이다.
여야 열람단은 22일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현재 국가기록원에서 회의록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여당 간사인 황진하 새누리당 의원은 “문건의 수, 문건 용량, 검색어 확인 등 모든 절차를 동원해 검색했지만 회의록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야당 간사인 민주당 우윤근 의원은 회의록이 국가기록원에 없다는 사실에 동의하면서도 “기록물 인수관리시스템의 심각한 부실이 확인됐고, 그 결과 회담록이 (노무현 정부로부터) 대통령기록관에 이관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새누리당은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조만간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최경환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사초가 없어진 중대 사태이기 때문에 검찰 수사 등을 통해 경위 자체를 명확히 규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문종 사무총장은 “친노 세력의 핵심인 문재인 의원이 대화록 실종을 책임져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은 이번 사건을 이명박 정권의 ‘기록관 게이트’로 명명하며 특검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신경민 최고위원은 이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검찰을 다 믿지 못해서 특검이 더 낫다는 공감대가 있다”면서도 “꼭 특검을 고집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결국 검찰이든 특검이든 과거 정부 청와대 인사들의 줄소환 조사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분석이다.
새누리당은 당분간 강공 드라이브를 이어갈 계획이다. ‘이명박 정부 폐기론’은 현실성이 낮다는 판단 때문이다. 실제 많은 전문가는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된 뒤에는 검찰 수사와 같은 특수 상황을 제외하고는 자료에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진실 규명이 필요하다’는 청와대의 기류도 감안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국회가 열리지 않는 7, 8월엔 여야가 합의 처리해야 하는 법안이 없다는 점도 여권의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민주당은 역공을 펴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크게 당혹해하는 분위기다. 신주류와 친노 강경파 간의 갈등 조짐도 보이고 있다. 당의 한 관계자는 “문재인 의원이 회의록을 공개하자고 했으면 뒷감당을 해야 하는데 아무런 근거 없이 의혹만 제기하고 있어 답답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새누리당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는 “부속자료는 여야 합의로 국회에 제출된 것이기 때문에 단독으로 보겠다는 주장은 반(反)의회주의적 발상”이라며 “여야 합의를 통해 국가정보원이 갖고 있는 회의록과 녹음파일을 함께 열람하면 된다”고 말했다.
길진균·장강명 기자 le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