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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캐프리오 교수 “韓日 역사갈등은 양국 모두 극단적 지점을 바라보기 때문”

입력 | 2013-07-24 03:00:00

日 릿쿄대서 일제강점기 한국사 가르치는 미국인 마크 캐프리오 교수




일본에서 일제강점기 한국사를 가르치는 마크 캐프리오 일본 릿쿄대 교수는 미국 워싱턴대 대학원에 다닐 때 3년간 한국어를 배웠지만 글 읽기에만 치중해 한국어 회화는 서툴렀다. 일본어만큼 한국어도 유창해지도록 연습하겠다는 그는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한국이 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 탐구해 책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마크 캐프리오 일본 릿쿄(立敎)대 교수(56·한국근현대사)는 미국인이다. 그는 일본 학생들에게 일본어와 영어로 일제강점기 한국사를 가르친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한반도에서 저지른 식민통치와 한국 민중의 저항에 대해 배우는 것이 일본 학생들로선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불평하거나 항의하는 학생은 없다.

“일제강점기에 대해 일본인이나 한국인이 꺼내기 어려운 민감한 이야기를 제가 주도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물론 제가 항상 객관적일 수는 없지만, 친일본적 혹은 친한국적 입장에서 벗어나 역사를 한 발짝 물러서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학자로서 장점이지요.”

최근 방한한 캐프리오 교수를 22일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만났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초청으로 한국에서 한 달 반 동안 머물면서 광복 이후 남아있던 일본 식민의 잔재가 한국사회에 끼친 혼란에 대해 연구할 예정이다. 그는 일본어는 유창하지만 한국어는 읽기에만 능해 인터뷰는 영어로 진행했다.

미국 플로리다 주에 있는 에커드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1980년 일본으로 건너가 10여 년간 영어 교사로 일하다 미국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 대학원에 진학했다. 거기서 동아시아 지역학을 공부하다가 해외 한국학 1세대인 고 제임스 팔레 교수로부터 “일본어를 잘하니 조선총독부 보고서를 읽어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문화통치 시기에 쓰인 방대한 분량의 조선총독부 보고서를 읽은 뒤 흥미를 느껴 박사과정에서 아예 일제강점기를 전공하게 됐다.

팔레 교수가 지도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은 ‘일본인이 된 한국인들: 일본의 동화 정책’(2001년)이었다. 서구와 일본의 식민정책을 비교하고, 일본이 황국신민화정책에 실패한 이유를 분석한 작업이었다. 일본의 동화 정책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일본의 거만한 태도 때문”이라고 밝혔다. “일본은 일본어 사용을 강제하고 한국 고유의 문화를 박탈하는 식으로 한국인을 자국문화에 동화시키려 하면서도 일본인과 차별하는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당연히 한국인은 반발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는 당시 일본이 한국에서 행한 초등교육 정책의 차별을 사례로 들었다. 1910, 20년대에 일본인은 6년제 초등학교에서 의무교육을 받았지만, 한국인은 초등교육이 4년제에 불과했고 그마저 비의무교육이었으며 교사당 학생 수도 훨씬 많았다.

그는 박사학위 논문에 필요한 자료를 얻기 위해 일본에 머물렀고 2000년대 초부터 일본 대학에서 한국사를 강의하다가 교수가 됐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동아일보가 일본의 동화 정책을 비판한 방대한 분량의 기사와 사설, 신문광고를 분석한 논문도 발표했다. ‘거부된 동화: 한국에서의 일본의 식민 정책에 대한 동아일보의 도전’(2003년)이다.

“동아일보는 ‘왜 한국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편한 신발인 게다를 신고 가장 불편한 옷인 기모노를 입어야 하냐’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1920년대 초 아일랜드가 영국에 대항해 펼친 독립운동 사례를 알리며 독립운동을 독려하기도 했죠. 일본이 신문을 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쓴 것이 무척 놀라웠습니다.”

오늘날에도 식민지 역사를 둘러싼 한일 양국의 갈등이 끊이지 않는 데 대해 제3자인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는 “양국 모두 극단적 지점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분석했다. “한국은 식민지시기에 모든 것이 악화됐다고 보지만 그렇지 않은 점도 있어요. 반면 일본은 한국의 근대화에 도움을 줬다고만 생각하는데 사실 경부선 철도도 순전히 일본의 편의를 위해 건설한 것이었죠.” 이어 그는 “한일 양국의 갈등 해소와 평화에 제가 조금이라도 기여한다면 기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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