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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타이 풀고 쉬었다 가시라

입력 | 2013-07-24 03:00:00

국립민속박물관 특별전 ‘쉼’




영국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가 1921년 한국 체류 당시에 그린 ‘장기 두기’.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유명 스타가 잔뜩 나오고 돈을 쏟아 부었는데 건질 게 없는 블록버스터 영화가 있다. 반면 빤한 예산을 들였지만 엄지를 치켜들게 하는 독립영화도 존재한다. 전시회가 영화라면 24일 시작하는 국립민속박물관의 특별전 ‘쉼’은 분명 후자에 속할 만하다.

기획전시실Ⅰ에서 열리는 ‘쉼’은 제목 그대로 무덥고 꿉꿉한 여름에 일상을 벗어난 여유로움을 주제로 한 기획전이다. 입구부터 실크스크린과 영상을 결합해 표현한 우리네 할아버지들의 ‘탁족(濯足)’이 ‘관람은 됐고 넥타이 풀고 쉬었다 가시라’고 말하는 듯하다. 안내를 맡은 김희수 학예연구사는 “전통적 여가의 의미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다양한 실험을 모았다”고 말했다.

1부 ‘푸른 그늘 실바람에 새소리 들레어라’는 전통 유물과 첨단기술을 자연스레 결합한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벽 쪽에는 금강산도나 관동팔경도를 시원스레 펼쳐놓고 그 앞엔 옛사람들이 유람 때 챙기는 소품들을 진열했다. 중앙에 있는 스크린에서는 앞에 설치된 노를 저으면 수묵화로 그린 금강산 풍경이 배를 몰고 지나가듯 움직였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그림 속 말 탄 선비가 고개를 넘는 인터페이스 프로그램도 유쾌했다.

널찍한 평상에 앉으면 물과 벌레 소리가 온몸을 감싸는 2부 ‘홑적삼에 부채 들고 정자관 내려놓고 있자니’는 계곡에서 수박을 쪼개먹는 청량감이 가득하다. 눈앞엔 푸르른 보리밭이 펼쳐지고 조상들이 여름철 애용했던 모시적삼과 등토시(등나무로 만든 토시)를 선보였다. 뒤로는 여름철 양반가 규방을 재현해 조상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3부 ‘한여름 밤 꿈, 속세를 벗어나니’는 전시 주제가 가장 여실하게 표현된 공간이다. 신발을 벗고 누우면 천장에 밤하늘 별빛이나 처마 끝 푸른 하늘을 볼 수 있는 공간을 배치해 스르륵 낮잠이라도 들 것만 같다. 푹신한 의자에 앉으면 보이는 대형스크린에는 한반도 명승지를 담은 풍경들이 상영된다. 천진기 민속박물관장은 “문 닫고 에어컨 트는 현대식 ‘막힌’ 쉼터가 아니라 낙낙한 공간을 마련해 바람의 흐름을 만끽하는 전통적 ‘열린’ 피서의 분위기를 전하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9월 23일까지. 무료. 02-3704-3114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