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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관들, ‘김지하 양심선언’ 외부 반출 도운 사연

입력 | 2013-07-25 03:00:00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76>민주교도관




1988년 시설 이전과 함께 공개된 서울구치소 내부 모습이다. 70년대에는 이보다 비좁고 시설도 매우 열악했다. 동아일보DB

기자는 이번 시리즈를 위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는 남에게 알려지지 않은 일을 하면서 민주 인사들을 도와준 ‘보석’ 같은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중에서도 ‘민주 교도관’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들은 서슬 퍼런 독재시절, 공무원 신분으로 정권유지 수단이었던 교도소에서 ‘죄수’들을 감시해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수시로 감옥을 드나드는 민주 투사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물심양면으로 돌봐주었다. 이들 중에는 민주 인사들을 도운 게 발각되어, 혹은 그들이 수배되었을 때 숨겨주었던 게 발각이 되어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도 있고 심지어 감옥까지 갔다 온 사람도 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국의 민주화는 몇몇 운동가의 헌신이 아니라 두터운 민중의 지지에서 가능했다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1967년부터 1979년까지 13년간 서울구치소에서 일한 전병용 교도관은 ‘민주 교도관’들의 좌장 격이다. 87년 5·3 인천항쟁 때에는 장기표 등을 숨겨준 혐의로 구속 수감되기도 했다. 홍성우 변호사도 “70년대에 감옥에 간 민주인사들 중에 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말한다(‘인권변론 한 시대’).

전 교도관은 김지하와도 인연이 깊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감되었을 때 만났던 그는 김지하가 출감한 지 27일 만에 다시 붙잡혀오자 못내 가슴 아파한다. 그는 당시 김지하의 모습을 1990년에 펴낸 ‘감방별곡-어느 민주 교도관이 본 서울구치소’란 제목의 책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동안 세 번째 투옥 경험이 있는 김지하는 다른 지식인들처럼 징역을 고달프게 살지는 않았다. 타고난 ‘광대기질, 건달기질’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누구와도 쉽게 친했고 징역을 크게 힘들어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무엇보다 (김지하 입장에서) 그전까지와는 다른 처우를 몸으로 확연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선 글자가 씌어 있는 책이란 책은 차입이 금지됐다. 교도소 당국이 넣어주는 성경마저도 허용되지 않았다. 변호인 접견 외에는 가족 면회조차 차단당했다. (여기에) 그를 감시하는 눈들은 곳곳에 수도 없이 배치됐다. …그래서 그랬는지 종전과 다르게 심각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깊은 고뇌에 빠져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줄 때가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김지하가 감옥에 있는 동안 검사의 공소장은 형이 가중되는 것으로 슬그머니 바뀐다. 변호를 맡았던 홍성우 변호사는 ‘인권변론 한 시대’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처음 죄목은 반공법상 이적표현물 제작 예비죄, 이적표현물 제작, 선전활동에 동조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반공법은 법정형이 7년 이하다. 징역을 아무리 주려 해도 7년이 상한이었다. 그러자 검사가 누범 가중 조항을 추가해 기소를 하는 식으로 슬그머니 공소장을 바꾼다. 김지하는 오적 사건 등으로 이미 반공법·국가보안법 위반 전력이 있어 누범이었는데 누범의 경우 최고 사형까지 처형할 수 있다는 법조문을 공소장 변경 형식으로 들이댄 것이었다. 더구나 1차 공판 기일이 인혁당 관련자들의 사형 집행이 이뤄진 직후인 5월 19일이어서 김지하가 바로 재판을 받으면 죽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홍 변호사는 “법정에 드나든 지 20년이 넘었지만 그때처럼 마음을 졸였던 때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변호인단이 찾아낸 묘수는 재판부 기피신청이었다. 이 제도는 피고인에게 불리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명백한 사람이 재판을 맡은 경우 그것을 기피할 수 있는 제도였다. 마침 김지하 담당 재판장이 인혁당 사건을 재판한 판사였다.

5월 19일 재판이 시작되고 인정 신문이 끝나자마자 김지하가 입을 열었다.

“지금 내 앞에 앉아있는 재판장이 인혁당을 재판한 판사다.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내 발언이 문제가 된 이번 사건에서 사건에 대한 예단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한 만큼 재판부 기피신청을 한다.”

재판부는 허를 찔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피신청을 받아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할 때까지 재판을 연기하는 식으로 1차 공판이 끝났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도 잠깐, 정작 사람들을 경악하게 한 일은 따로 있었으니 그즈음 중앙정보부가 ‘김지하 반공법위반 사건의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노란색 표지의 괴문서를 찍어 국내외에 대량으로 배포한 것이다. 다름아닌, 김지하가 정보부에서 작성한 자필 진술서였다. 여기에는 그가 스스로를 ‘맑스주의자’라 고백한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을 읽다 보면 누구라도 ‘김지하는 틀림없이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게 되어 있었다. 정보부의 강압에 따른 자백이었는데도 정보부는 이 문건을 5개 언어로 번역해 외국에까지 돌렸다. 김지하를 국내외적으로 완전히 매장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재판부 기피신청으로 가까스로 당장의 위기는 벗어날 수는 있었으나 정보부가 돌린 괴문서는 앞으로 다가올 위험의 실체를 피부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필시 무슨 일을 당하고야 말 것 같았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동료와 친지들이 대책을 숙의하기 시작했다. 접견이 허용된 변호사와 성직자들을 통해 ‘김지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진실을 세상 밖으로 전할 수 있는 구체적 활로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논의됐다. 그래서 나온 것이 ‘양심선언’이었다.

김지하가 옥중에서 자신의 결백을 담은 양심선언을 쓰고 이것을 교도소 밖으로 반출해 국내외에서 광범위한 구명 운동을 벌이자는 계획이었다. 이때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전 교도관이다.

전 교도관이 책 ‘감방별곡’에서 털어놓은 회고다.

‘내 역할은 김지하와 밖에 있는 사람들의 각종 서신 연락을 통해 양심선언을 보완하고 완성하는 작업을 돕는 것이었다. 또 작성 경위와 감옥 밖으로의 반출 경로를 조작해 나중에 선언이 공개됐을 때 정보기관이 그 과정을 알 수 없도록 알리바이를 세우는 일까지 포함됐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것이었지만 내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상당한 위험도 수반되는 것이었다.’

전 교도관은 ‘단순한 것’이라고 했지만 감시가 철벽같은 상황에서 김지하를 돕는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 졸이는 일이고 위험한 일이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전 교도관은 자신의 야간근무가 돌아올 때마다 수감자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 종이와 필기구를 김지하에게 건넸다. 그리고 김지하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A4 크기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자신의 억울한 심경과 박정희 정권을 향한 비판을 쏟아내면 그 문건을 넘겨받아 다음 날 퇴근할 때 몸에 숨겨 밖으로 가지고 나왔다. 이 일은 수차례 반복됐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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