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전의 상소 엮은 ‘시폐’ 번역서 출간
조선시대 도시 상점을 살펴볼 수 있는 연광정연회도. 그림 속 도시는 한양이 아니라 평양이지만 평양에도 지방관청이 공인한 시전상인만이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성문 바로 왼편의 상점은 당시 고급 담배였던 서초(평안도산 담배)를 팔던 연초전이다. 아카넷 제공
최근 조선 영조 때 한양 도성 시전의 상소와 그에 대한 조처를 엮은 ‘시폐(市弊)’가 한글로 번역됐다. 1753년 작성된 시폐는 본디 총 3책이었는데 2책과 3책만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보존돼 있다. 시폐는 대동법 시행 이후 국가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상인이었던 공인(貢人)의 상소와 조처를 기록한 공폐(貢弊·전 6권)와 더불어 조선시대 후기 상업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시폐를 한글로 번역하고 해제를 단 조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도움을 받아 시전상인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시전상인 수는 얼마나 됐나.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은 특권이 아니었나.
“대동법이 시행돼 공물을 쌀로 받으면서 다양한 물품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정당한 권리였다. 시전상인들은 궁궐 도배와 수리, 봉조(바느질), 도로청소의 국역이 있을 때마다 동원되는 대신 국가로부터 상품 전매권을 부여받은 국가공인 상인이었기 때문이다. 시전은 매번 국역이 있을 때 이를 100푼(分)으로 나눠 1∼10푼의 책임을 나눠 맡는 유푼전과 정해진 책임은 없지만 그때그때 동원되는 무푼전으로 나뉘는데 그 비율이 대략 반반가량 됐다. 육의전 상인은 7∼10푼의 부담을 짊어졌다.”
―그럼 난전으로 시전상인의 상권을 위협한 주체는 누구였는가.
“유력 관리와 군인들을 등에 업은 무뢰배가 대다수였다. 상설매장을 연 것은 아니었고 단기이익을 노리고 매판을 벌였다가 소기의 이익을 거두면 철수하는 식이었다. 시폐를 보면 이런 유력자를 등에 업은 난전에 대한 상소와 항의가 많다.”
“운종가는 대략 광화문우체국 동쪽부터 종로3가 입구 사이의 종로통을 말하는데 주로 육의전이 있었다. 비단 모시 면포 삼베 종이 건어물 모자 등 6∼8종류만 취급했다. 그 밖의 상품은 청계천 다리 부근과 동대문, 남대문 등 서울시내 곳곳에 설치된 다양한 시전에서 팔았다. 큰 시전은 여러 곳에 분점을 두기도 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