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TK와 서먹한 MB “대구는 분지라 폐쇄적인게 문제”
2009년 9월 경북 포항시 죽도시장을 방문해 어릴 적 아이스케키 장사의 추억을 떠올리는 이명박 대통령. 가난해서 아이스케키를 팔아야 했고, 상고 야간부를 다녀야 했던 MB가 자신을 ‘TK’라고 생각했을까? 1987년 김진현 동아일보 논설위원실장이 처음 사용한 ‘TK’라는 말은 단지 대구·경북의 영문 이니셜이 아니었다. 그건 ‘끼리끼리 문화’의 약자였다. 동아일보DB
“이명박(MB) 대통령의 몸에는 대구·경북(TK)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상득(SD) 의원은 2011년 4월 8일 대구·경북 지역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까지 했다. 일주일쯤 전 정부가 ‘동남권 신공항’ 건설 방침을 백지화한 이후 TK 지역 언론이 연일 ‘배신’ 운운하며 들끓자 답답해서 내뱉은 말이었다.
며칠 뒤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로부터 “대통령에게는 대한민국의 피가 흘러야 한다”는 핀잔을 듣긴 했지만 SD는 동생을 위해 동정표라도 구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답답하기로 치자면 MB가 더했다.
1년쯤 전인 2010년 3월 1일. 이날 아침 청와대에 배달된 경북일보엔 ‘靑, 세종시 관련 대구·경북 언론논조 불만 많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런데 이 기사는 다음 날부터 이동관 홍보수석비서관의 ‘TK 놈들’ 발언 파문으로 비화됐다. 기사 내용 중에 이동관이 전날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대화 도중 “TK 놈들, 정말 문제 많다. 이건 기사로 써도 좋다”고 말했다는 대목이 들어 있었다. 이동관이 “대구·경북 지역에서 ‘역차별’ 운운하며 다른 지역보다 (대통령의 세종시 정책에) 더 반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대통령이 대구·경북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쓰는데 그렇게 하느냐”며 그런 막말을 했다는 것이다.
이동관은 또 “(대구) 첨단의료복합단지 같은 경우도 이 대통령이 챙겨주지 않았으면 선정되지 못했을 프로젝트”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일찍부터 의료기기 클러스터를 준비해온 강원 원주시까지 제치고 대구가 첨단의료복합단지에 선정됐을 때부터 특혜 논란이 많았는데, 이동관이 그걸 확인해준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TK 놈들, 정말 문제 많다’는 보도는, ‘고소영(고려대·소망교회·영남)’도 ‘S라인(MB의 서울시 인맥)’도 아닌 이동관을 코너로 몰았다. 이동관은 이동관대로 “(TK 놈들이라는 보도는) 명백한 오보”라며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예민한 문제였다.
경북 영일 출신으로 MB와 동향일 뿐 아니라 포항 동지상고 후배인 한나라당 이병석 의원(현 국회부의장)과 경북 울진 출신인 주호영 특임장관(현 새누리당 의원)이 이동관에게 전화를 걸어 “(너무 강경하게 나가지 말고) 좋게 넘어가라”고 조언했다. 두 사람만 해도 경북고 중심의 이른바 ‘TK 주류’는 아니었지만 지역구 의원에게 지역 언론은 ‘갑(甲)’이었다. 하지만 한 번 치솟은 불길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강재섭이 빠진 대구에서 ‘TK 좌장’을 꿈꾸던 친박(친박근혜)계 이한구 의원은 라디오에 출연해 “머슴이 주인을 욕한 격”이라며 이동관의 즉각 사퇴를 주장했다. 표면적으로는 “주인인 국민을 욕하고 덤벼들었다”는 말이었지만 뉘앙스는 좀 묘했다. ‘MB 정권의 주인은 TK’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듯한 어투였다. 그사이 이동관의 ‘TK 놈들’ 발언은 사실처럼 굳어져 갔다.
이한구와 마찬가지로 경북고 출신의 TK인 권재진 민정수석비서관까지 나서 “(그런 표현을 쓴 것이) 사실 아니냐?”고 되물었다.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동관은 급기야 술자리에서 권재진에게 “내가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지만 정말 TK들은 안 되겠군요”라고 말할 만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동관은 경북일보를 상대로 5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경북일보 사장이 찾아왔으나 이동관은 “대통령의 고향 신문이라고 제멋대로 쓰는 건 못 참는다”며 강경한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야당은 이동관의 소송까지 문제 삼았다.
정작 MB의 반응은 한나라당의 TK 의원들이나 청와대 TK 참모들과 달랐다. 처음엔 MB도 경북일보 보도를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MB=“(웃으며) 내가 이 수석을 몰라? TK 놈들이라고 했겠지 뭐….”
이동관=“(정색을 하고 자초지종을 설명한 뒤) 그런데 제가 TK 놈들이라고 했겠습니까?”
MB=“알았어. 그러게 뭐 하러 (하필이면 TK 언론에) 그런 얘기를 해. 여하튼 TK는 조심해!”
사실 MB는 굳이 비유하자면 ‘변방 TK’였다.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 노태우 대통령 때까지 30년간 권력을 향유한 소위 ‘TK 주류’에 비하면 TK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비주류였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때 TK가 선택한 후보도 MB가 아니라 박근혜였다.
특히 대구 지역 당원 및 대의원 투표에서 MB는 2305표를 얻어 박근혜(5072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대선 본선에선 물론 압도적인 득표를 했지만 전북 출신에 ‘헌정 사상 최약체 여당 후보’였던 정동영과의 대결이었기 때문에 그건 별 의미가 없었다. PK(부산·경남) 출신의 한 친이(친이명박) 핵심 인사는 “경선 때 MB는 대구에서 철저히 비주류로 취급받았다. 그게 쉽게 잊히겠느냐”고 회고했다.
지역 언론의 시선도 비슷했다.
“제대로 된 TK 출신이 아닌 이명박 대통령이 TK를 너무 홀대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 대통령은 자신을 TK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구·경북) 시도민은 수도권과 더 정서적 친밀감이 있다고 여긴다. 정치권에서도 TK 정권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있을 정도다. 이한구 의원은 ‘현 정권을 TK 정권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2010년 7월 16일 경북일보)
‘이 대통령은 자신을 TK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이라는 전제가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MB에 대해 ‘수도권과 더 정서적 친밀감이 있다고 여긴다’고 분석한 대목은 비교적 정확해 보인다.
2008년 취임 직후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수도권(서울, 인천, 경기) 지역구 111곳 중 81곳에서 승리를 거두자 MB는 “이제 한나라당은 (영남당이 아니라) 수도권 정당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선언했다. 엔도르핀이 솟는 표정이었다. 서울에서는 전체 48개 지역구 중 40곳을 차지하는 대역전이었다. 전통적으로 야당이 강세를 보여온 수도권에서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둔 배경엔 분명 ‘MB 효과’가 있었다.
경북일보의 ‘이동관, TK 놈들 발언’ 보도가 나온 지 며칠 뒤 MB는 대구를 방문했다. 대구시청과 경북도청의 2010 업무보고 자리였다.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서두는 그렇게 꺼냈지만 MB는 작심한 듯 TK를 질타했다. “근래에 세종시가 되면 대구·경북이 어려워진다, 손해를 본다는 말이 있다. 대구·경북이 지난 10년, 15년 동안 불이익을 당했다고 할지 모르지만 머릿속에 정치적 계산은 버리고 오로지 어떻게 지역을 발전시킬 것인가만 생각해라. 대구가 분지(盆地) 생각에 제한돼 있고, 그 안에서 네 편, 내 편 가르면 어떻게 발전하겠느냐. 내 이야기를 정치적으로 해석하지 말아 달라.”
분지적 사고(盆地的 思考). MB는 TK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이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퇴임 직전 동아일보와 인터뷰를 하는 자리에서도 MB는 “대구 이런 곳은 분지잖아요? 닫혀 있어서 외부 문물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부산이나 인천에 비해 느릴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분지나 내륙 도시의 폐쇄성, 보수성에 관한 일반적인 지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더구나 MB처럼 젊을 때부터 세계를 무대로 뛰어다닌 사람들 중엔 이런 유(類)의 ‘지리적 특질고(特質考)’를 인용하는 경우가 그리 드물지는 않다. MB 스스로도 ‘정치적 해석’을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정말 그뿐이었을까?
앞서 인용한 PK 출신 친이 핵심 인사의 증언은 좀 다르다. “사실 MB가 분지적 사고를 언급한 것은 TK뿐만 아니라 (계파 정치와 대선 득표 전략에 매몰돼 세종시 문제 같은 국가적 과제조차 편 가르기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답답함도 깔려 있었다. 적어도 그때까지만 해도 MB는 박 전 대표를 지지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생각의 끝에서 나온 카드일까. MB는 석 달여 뒤 세종시 수정안이 결국 좌절되자 PK 출신의 40대 국무총리를 깜짝 발탁한다.
김창혁 선임기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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