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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권순활]이병철의 길, 이재현의 길

입력 | 2013-07-27 03:00:00


권순활 논설위원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타계하기 열 달 전인 1987년 1월 ‘부국론(富國論)’이란 제목의 언론 기고문에서 한국 경제의 발전전략을 제시했다. 당시 77세였던 그는 이미 폐암 진단을 받고 힘겨운 투병생활을 하고 있었다. 삼성의 명운을 걸고 반도체산업 진출을 선언한 것은 1983년, 그의 나이 73세 때였다.

사업에서 평생 1등을 추구한 치열한 승부사 이병철은 인생의 황혼기까지 ‘기업과 국가’라는 화두와 씨름한 거인(巨人)이기도 했다.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눴던 일본 언론인 야마자키 가쓰히코는 2010년 “그의 사업가적 충동에는 국민을 가난에서 구하고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해 강한 나라를 만들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게 깔려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보다 앞선 일본에서 배워야 하지만 언젠가 꼭 일본을 이겨야 한다고 자주 강조한 것도 이런 평가와 맥이 닿아 있다.

오늘 정전 60년을 맞은 6·25전쟁 경험은 이병철의 확고한 국가관과 사업보국(報國) 신념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피란을 가지 못해 서울 수복 때까지 숨어 지냈던 그는 뒷날 한 강연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적(敵) 치하에서 90일을 체험하고 보니 공산주의는 인류사회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세계였습니다. 그때 자유민주주의와 국가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게 됐고 내 인생관도 바뀌었습니다. 국가가 있고 나서야 사업도 있고 가정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횡령 배임 탈세 혐의 등으로 최근 구속 기소된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이병철의 장손(長孫)이다. CJ의 모기업인 CJ제일제당은 정전협정이 체결된 1953년 이병철이 제조업에 처음 진출하면서 세운 유서 깊은 기업이다. 하지만 CJ 총수 이재현이 걸어온 길은 ‘사업을 통해 국가에 보답한다’는 이병철의 길과 달랐다. 검찰이 기소한 경제범죄 혐의는 말할 것도 없지만 다른 문제들도 간단치 않다.

‘이재현의 CJ’는 본업의 국제 경쟁력을 높이는 일은 뒷전이었고 계열사인 CJ E&M을 통해 영화와 방송 분야에서 문어발식 인수합병으로 덩치를 키우는 데 주력했다. 재벌의 금력(金力)을 바탕으로 영화계를 쥐락펴락하는 큰손이 된 뒤 좌파 문화권력에 노골적으로 영합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CJ의 방송채널들은 보도기능을 할 수 없는데도 때론 교묘하게, 때론 대놓고 법령을 무시하면서 현실 정치와 정책에 대한 입김을 키우려 했다.

CJ의 행태에 대해 ‘할아버지는 평생 사업으로 나라에 헌신했는데, 손자는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대한민국을 흔드는 세력과도 손을 잡는 사업종북(從北)을 하느냐’는 비판까지 일각에서 나왔다. 표현은 좀 지나쳤다고 보지만 이병철의 장손 이재현이 이런 질타를 받는 현실은 씁쓸하다.

논픽션 작가 홍하상 씨는 평전(評傳) ‘이병철 경영대전’에서 “제일제당이란 회사명에는 한국 경제의 제일 주자로서 국가와 민족의 번영에 기여한다는 이병철의 뜻이 담겨 있다”고 소개했다. 이병철은 1979년 삼성 사장단 회의에서 “사업을 할 때 정치와 야합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역설했다. CJ가 정치적 오염에서 벗어나 정상적 기업으로 돌아가는 일은 창업이념을 계승하고 회사를 살리기 위해 늦출 수 없는 과제다.

이병철을 비롯한 1세대 기업인들도 때로 과오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뚜렷한 발자취와 애국심은 산업화의 성과를 폄훼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해 대다수 한국인의 삶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

기업이 돈을 벌려고 존재하는 조직인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한국의 기업사(史)는 국가와 떼어 놓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현재 대기업을 이끄는 상당수 리더는 근대화·산업화 영웅들의 육신, 또는 정신의 후손이다. 선대(先代)들이 힘들게 회사를 세우고 키우면서 가슴에 다짐했던 창업이념과 경영철학을 사사(社史)에서 꺼내 한번쯤 진지하게 되새겨보길 바란다. ‘국가가 있어야 기업도 있다’는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