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참외 막 익으면 모인다… 까닭없이 불참할 땐 벌주 석잔
[1] ‘죽란시사첩’으로 밝혀진 ‘익찬공서치계첩’의 표지. [2] 새로 발굴된 ‘죽란시사첩’에 있는 ‘사약’의 일부. 첫 조항에 ‘선배들은 융성했던 시절에 많이들 동갑계를 만들었다. 이제 그 취지를 모방하되 범위를 조금 넓혀서 나이 차가 7, 8세가 나더라도 모두 포함시킨다’(줄친 부분)고 써 있다. 안대회 교수 제공
그동안 죽란시사첩의 서문인 죽란시사첩서만 남아 전해져왔다. 그런데 최근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가 죽란시사첩으로 확실시되는 고문헌을 발굴했다. 안 교수가 발굴한 문헌은 개인이 소장한 ‘익찬공서치계첩(翊贊公序齒(결,계)帖)’으로, 지난해 다산 탄생 250주년을 기념해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에서 열린 전시회에 출품된 것이다. 전시 때만 해도 첩 안에 다산의 이름이 있어 다산이 간여한 계의 계첩이자 익찬공이라는 인물의 활동을 기록한 유물로 추정됐을 뿐이었다. 안 교수는 이를 면밀히 고증해 죽란시사첩의 실물임을 확신하고, 고증 내용을 담은 논문 ‘다산 정약용의 죽란시사 결성과 활동 양상’을 26일 연구모임 문헌과해석에서 발표했다.
8개 조항으로 된 사약의 내용도 서문의 내용과 부합하되 좀 더 자세하다. ‘아들을 낳은 계원이나 자녀를 결혼시킨 계원, 지방 수령이나 감사로 나간 계원, 품계가 올라간 계원은 모두들 본인이 잔치를 마련한다.’ ‘매년 봄가을에 날씨가 좋으면 각 계원에게 편지를 보내 유람할 곳을 낙점하고 꽃을 감상하거나 단풍을 구경한다.’
사약에는 서문에는 없는 ‘벌칙’에 대한 조항이 있다. ‘연회할 때 떠들썩하게 떠들어서 품위를 손상시키는 계원은 벌주 한 잔을 주고, 세상 사람의 과오를 들춰내 말하는 계원은 벌주 한 잔을 준다.’ ‘모두와 함께하지 않고 사사로이 작은 술자리를 갖는 계원에게는 벌주 석 잔을 준다. 까닭 없이 모임에 불참할 때에도 벌주 석 잔을 준다.’
안 교수는 “이처럼 규약을 문서로 남기는 문예모임은 드물다”며 “사실 죽란시사는 창작 서클의 차원을 넘어 남인 정치 세력을 결집하는 모임이었는데, 외부에 정치적 결사로만 보여 공격당할 것을 우려해 규약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 계첩의 제목에 대해 안 교수는 “죽란시사 회원 중 한 명인, 익찬이라는 벼슬을 지낸 한백원이 소장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당시 계모임에선 관례적으로 계원의 명단과 규약 등을 담은 계첩을 회원 수만큼 제작해 각자 소장했다. 안 교수는 “익찬공서치계첩의 제목 글씨가 본문 글씨와 확연히 다른 데다 ‘공(公)’이라는 표현은 한백원이 죽은 뒤 붙은 것이어서, 그의 사후에 후손이 임의로 제목을 지어 쓴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또 “본문 글씨는 다산의 필체는 아니나 시사가 결성될 당시 회원 중 누군가가 쓴 것이 분명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