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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환상의 빛

입력 | 2013-07-29 03:00:00


환상의 빛
―강성은 (1973∼)

옛날 영화를 보다가
옛날 음악을 듣다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

명백한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몇 세기 전의 사람을 사랑하고
몇 세기 전의 장면을 그리워하며
단 한 번의 여름을 보냈다 보냈을 뿐인데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단 한 번의 여름’이라면 한평생을 사계절로 나눴을 때의 여름, 청춘을 뜻하는 것이겠다. 나무로 치면,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보고, 왕성한 식욕으로 햇빛을 빨아들이고, 폭풍도 뇌우도 제 생장의 기폭제로 삼아 더욱 싱싱해지고, 이윽고 열매를 맺기 시작할 시기. 그런데 화자는 오직 ‘옛날 영화를 보다가/옛날 음악을 듣다가’ 그 시기를 보냈단다.

입맛에 맞는 영화를 보고, 음악이나 들으면서 몽롱하게 시간을 보내는 건 세상 편하고 달콤한 일이다. 앗,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보다 내가 더 나이를 먹어버렸구나! 화자는 화들짝 놀라며 자기가 현실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음’을 깨닫는다.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 연애도 취직도 장래를 위한 공부도, 따라서 실연도 어떤 실패도 좌충우돌도 없이, 아무짝에도 쓰이지 않은 청춘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다’. 우두커니 우거지는 그 현실을 미처 보지 못했네. 몇 세기 전 사람과 몇 세기 전 장면, 그 환상을 사랑하고 그려서. 그 빛이 눈을 가득 채워서!

이제 더이상 자기가 젊지 않다는 깨달음은 꽤 기를 죽인다. 젊음에 대한 안달과 젊음을 헛되이 보냈다는 이런저런 자책과 회한이 유난히 가슴을 찌르는 시기가 있다. 시인이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그 고뇌를 삭일까. 혹은 새길까.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