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논설위원
신경숙의 소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 나오는 얘기다. 말을 어디다 갖다 붙이느냐에 따라 뜻이 이렇게 달라진다. 이 남학생은 변태남으로 찍혔을 게다.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는 ‘민의의 전당’은 이 남학생과는 차원이 다른 ‘언어 신공(神工)’들의 각축장이다.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이해찬 민주당 상임고문은 박근혜 대통령을 ‘당신’이라 부르며 폭언을 쏟아낸 뒤 “당신은 상대방이 없을 때 높여 부르는 말”이라며 꽁무니를 뺐다. 역시 당내 최다선(6선)다운 내공이다. 같은 당 신경민 최고위원은 MBC 앵커 출신답게 “‘당신’의 어법에 대해 공부하라”며 훈계했다.
정치권의 ‘막말 퍼레이드’는 새 피 수혈을 막는 그들만의 카르텔이다. 이런 난장판에 정신 멀쩡한 사람이 끼고 싶겠는가. 박 대통령이 정치와 거리를 두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대통령은 정치의 정점에 있다. 국민은 체감도가 낮은 정책보다 노출빈도가 높은 정치를 보며 국정의 흐름을 읽는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이 정치에 입을 여는 건 두 가지 경우뿐인 것 같다. 자신이 부당하게 공격받는다고 생각할 때와 사안의 핵심을 잘 모를 때다. “새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지라는 것은 난센스다”는 항변은 전자요, 지방의료원의 만성적자를 두고 “착한 적자가 있다”는 말은 후자다.
정치권이 지난 한 달여 간 사초(史草) 논란으로 허우적댈 때 박 대통령은 방관자였다. 여야 모두가 패자가 돼 다시 민생을 얘기하지만 정치권의 회귀본능이 언제 발동될지 모른다. 그럼 또다시 대통령 혼자 경제니, 일자리니 동분서주하겠지만 정치의 뒷받침 없는 정책은 공허하다. 우선순위를 정해 자원을 배분하는 일은 정치의 몫이다. 일자리 창출, 창조경제, 서비스업 규제완화 등 핵심 과제들이 겉도는 건 국정과 정치가 따로 놀기 때문이다.
선제적 대응을 강조하는 박 대통령이 먼저 국가정보원의 정치 개입을 질책하고 국정원 개혁 방안을 제시해 국론 분열을 막을 순 없었을까. 대선 불복을 통해서라도 연명하려는 야권에 먼저 위로와 협력의 손을 내밀 순 없었나. 박 대통령은 나라 곳간을 탈탈 털어 온갖 국정과제를 밀어붙이면서도 유독 국가지도자 연석회의 구성이나 기회균등위원회 설치, 대탕평 인사 등 돈 안 드는 정치 공약에는 관심이 부족한 듯 보인다.
선거에서 이기는 것과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한 번 성공을 거둔 사람은 다른 문제도 같은 방법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오류에 빠지기 쉽다. 대선 성공 신화를 쓴 전직 대통령들이 한결같이 통치에 실패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