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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분구조 단순한 그룹이 경영권 더 취약

입력 | 2013-08-01 03:00:00

■ 법무부 입법예고 상법개정안, 가상 기업에 적용해보니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합니다.”

2015년 2월 중순. 경민그룹의 권수호 부회장은 비상 임원회의에서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핵심 계열사인 경민반도체 주주총회를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경민반도체 지분 16.5%를 사들인 헤지펀드 라이온펀드연합은 2주 전 주주 제안을 통해 감사위원 후보를 3명 추천했다.

그룹 법무팀의 강저지 이사가 다른 임원들을 위해 현황을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우리 그룹의 지주회사인 ㈜경민은 경민반도체 지분을 32.8%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년 10월부터 시행된 새 상법에 따라 감사위원이 되는 이사를 선출할 때는 의결권을 3%까지만 행사할 수 있죠. 반면 6개의 펀드로 지분을 분산시킨 라이온펀드연합은 의결권 16.5%를 모두 행사할 수 있습니다.”

‘다음 달 임기 만료로 교체되는 감사위원 3명이 모두 라이온펀드 측 인사로 채워진다면….’ 권 부회장은 경민반도체 이사 7명 중 3명이 반대편으로 채워지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룹 기획본부 전의전 본부장의 암울한 보고가 이어졌다. “라이온펀드 측은 ‘감옥을 들락날락하는 오너가 있는 만큼 감사위원회의 역할을 강화해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고 소액주주들도 일부 동참하는 분위기입니다.”

강 이사는 “더 큰 문제는 감사위원이 아닌 이사 두 명이 이번에 교체되는데 라이온펀드 측이 여기에도 한 명의 후보를 추천하며 집중투표제 도입을 요구한 것”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집중투표제는 두 명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주식 1주에 선임할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주는 제도다. 상법 개정안은 자산이 일정 규모 이상인 상장회사의 주주가 집중투표제를 요구할 경우 의무적으로 도입하게 했다.

권 부회장은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해본 계산을 다시 시작했다. 경민그룹 측 후보 2명과 라이온펀드 측 후보 1명이 맞붙는다면…. ㈜경민은 2명에게 32.8%씩 의결권을 행사하지만 라이온펀드는 1명에게 33%(16.5%×2)를 몰아 줄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감사위원 3명을 포함해 라이온펀드 측이 이사회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다.

“그렇습니다. 그룹의 핵심인 경민반도체의 경영권이 헤지펀드에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강 이사의 말에 임원들이 술렁였다.

권 부회장은 서둘러 분위기를 진정시켰다. “회장님과 함께 지난주부터 밤낮으로 국내 연기금과 해외 투자자들을 만나는 중이에요. 다행히 연기금들은 ‘한국 대표기업이 외국 자본에 넘어가서야 되겠느냐’는 분위기입니다.”

그룹 내 실세로 꼽히는 최정예 마케팅본부장은 “전처럼 총수 일가와 계열사들이 지분을 3∼5%씩 나눠 갖고 있었으면 골치 아플 일이 없을 텐데 괜히 지주회사로 전환해서…”라고 푸념했다.

권 부회장은 최 본부장의 눈빛에서 ‘당신이 주도해 그룹을 지주회사로 전환시켰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 아니냐’는 비난을 감지하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룹이 위기에 처했습니다. 오늘부터라도 각자 네트워크를 총동원해 경민반도체 주주들을 만나세요. 위임장을 받든 협조 약속을 받든 단단히 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위 시나리오는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상법 개정안이 통과됐을 때의 상황을 가정해 본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경제민주화 입법이 일단락됐다고 선언했지만 기업들은 여전히 경영에 부담을 주는 법안이 하반기(7∼12월) 국회에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상법 개정안은 그중에서도 특히 경영권에 영향을 줄 수 있어 기업들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본보가 시나리오에 나온 대로 상법 개정안 중 감사위원이 되는 이사 선임 시 대주주 의결권을 제한하는 조항을 10대 그룹에 적용한 결과 5곳이 핵심 계열사 경영권 유지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지주회사로 전환해 출자구조를 단순하게 만들라는 정부의 권고를 따른 곳이 투기자본의 공격 대상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순환출자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삼성전자는 계열사와 총수 일가에 지분이 분산돼 상법이 개정되더라도 대주주 측이 지분 17.32% 중 11.67%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에 대한 기업들의 우려도 크다. 현재 도입 여부를 자율에 맡기고 있는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면 외국 투기자본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할 사람에게 표를 몰아주고 단기간에 이익을 챙긴 뒤 한국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감사위원 이사 선임 시 의결권 제한 규제와 집중투표제가 동시에 일어난다면 경영권 위협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한층 높아질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기업 사냥꾼’으로 불리는 칼 아이칸은 2006년 지배구조 개선을 내세우며 집중투표제를 통해 사외이사 1명을 KT&G 이사회에 진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아이칸은 이후 10개월 만에 주식을 몽땅 팔고 1500억 원을 챙겨 떠나 ‘먹튀의 전형’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재계는 현재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 나라는 러시아, 멕시코, 칠레밖에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박수영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미국의 경우 50개 주 가운데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고 있는 곳은 기업이 거의 없는 5개 주밖에 없다”며 “기업들이 회사의 이익보다 펀드의 수익률 극대화를 노리는 투기자본에 농락당할 소지가 크기 때문에 자율에 맡기는 것이 맞다”고 지적했다.

장원재·박창규 기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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