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인문사회]호랑이에 물린 것만큼 아파서 호역으로 불린 콜레라

입력 | 2013-08-03 03:00:00

◇호환 마마 천연두/신동원 지음/399쪽·2만 원/돌베개




지금은 쓰이지 않지만 ‘병하다’란 우리말이 있었다. 광복 전후까지 쓰였던 이 말은 ‘병들다’ 내지 ‘병나다’에 해당하는 단어다. 오늘날 그 흔적은 ‘염병하다’라는 비속어로만 남아 있다. 염병은 장티푸스의 옛말로 이는 곧 ‘염병을 앓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옛사람들은 ‘병들다’라는 수동적 개념이 아니라 ‘병하다’라는 능동적 개념을 썼을까? ‘병들다’의 개념에 19세기 후반 세균학의 발달을 반영해 외부의 균에 의해 감염된다는 객관적 인식이 강하게 작용한다면 ‘병하다’는 병자 자신의 주관적인 병앓이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즉 요즘의 병 개념이 그 과학적 원인을 중시한다면 과거의 병 개념은 그 병에 의해 고통받는 환자의 실존적 상황을 중시했다.

2004년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를 썼던 저자(KAIST 교수)는 이번 책에선 한국에서 병과 위생, 건강의 개념이 어떻게 변모했는지를 추적한다. 초점은 서양의학이 소개되면서 전통 한의학적 개념의 변화가 이뤄지는 19∼20세기에 맞춰져 있지만, 그 비교를 위해 중국 은나라 시절 갑골문부터 광복 전후 출간된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까지 뒤졌다.

책 제목의 호환(虎患)은 본디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 화를 뜻한다. 하지만 1821년 국내에서 처음 유행하며 한 달 만에 10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콜레라의 증세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을 때만큼 고통스럽다고 해서 호역(虎疫)으로 불렀다. 처음엔 그 정체를 몰라 괴질 또는 발뒤꿈치 근육 경련을 유발한다고 쥐통으로 불렸다. 19세기 후반 중국에서 콜레라를 음차한 호열랍(虎列拉)이나 일본에서 음차한 호열랄(虎列剌)을 오독해 호열자(虎列刺)로도 불리던 호역은 결국 광복 후 미군정을 거치며 그 호칭이 콜레라로 낙착됐다.

마마는 천연두의 옛 호칭이다. 원래는 역질(疫疾)이나 두창(痘瘡)으로 불렸으나 병자호란을 겪은 뒤 같은 질병을 뜻하는 만주어 ‘마마’를 쓰게 됐다. 오랑캐 호자를 써서 호역(胡疫)으로 쓰다 청과의 관계가 호전되면서 한자를 살짝 바꿔 호역(戶疫)으로 표기했다. 천연두는 19세기 말 종두법을 시행하고 나서 20세기 초에 등장한 병명인데 ‘인공으로 만든 종두가 아니다’라는 뜻.

한림대 한림과학원이 2009년부터 추진한 일상개념총서의 첫 권으로 기획된 이 책은 이처럼 병과 관련한 개념의 시대적 변천을 흥미롭게 짚어 준다. 하지만 딱딱한 학술서 형식을 벗어나지 못해 일반인이 읽기엔 다소 벅차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