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지사, 나이가?” 물었던 MB, 48세 총리 지명했지만…
2012년 7월 20일 새누리당 대선 경선 주자들이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국민공감경선 실천 서약식’에 참석해 서로 손을 엇갈려 맞잡고 있다. 왼쪽부터 김태호 의원, 박근혜 의원,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경남지사 시절인 2009년 12월 낙동강 살리기 기공식에서 당시 이명박 대통령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준 김태호는 이듬해인 2010년 8월 국무총리 후보로 전격 발탁됐지만 인사청문회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다. 김태호는 올해 이 전 대통령 퇴임 후 와인을 들고 자택을 찾아가 인사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동아일보DB
2010년 6월 18일 김영삼 전 대통령(YS) 기록전시관 준공식 참석을 위해 경남 거제로 향하는 마이크로버스 안. 이명박 대통령(MB)이 통로를 사이에 두고 옆 좌석에 앉아 있던 김태호 경남지사에게 뜬금없이 나이를 물었다. MB 정권의 중간평가 격이었던 6·2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한 직후였다.
김태호는 1962년생, 48세였다. 김태호가 나이를 얘기하자 MB는 또 이렇게 말했다. “김 지사도 실제로는 나이를 많이 먹은 거야.”
두 달 뒤 MB는 48세의 김태호에게 내각을 맡기는 파격 인사(8·8 개각)를 전격 단행했다. 1971년 제3공화국 시절 당시 45세였던 김종필 민주공화당 부총재가 총리로 기용된 이후 39년 만에 40대 국무총리가 탄생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친박(親朴·친박근혜)계는 들끓기 시작했다. 박근혜 전 대표의 ‘대항마’를 키우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라며 흥분했다. 한마디로 ‘박근혜 죽이기’라는 것이다. 김태호는 박근혜보다 열 살 적었다. 2012년 대선 때는 50세로, 차세대 주자로 내놓은 카드라고 의심할 만했다.
내심 김태호도 욕심이 생겼다. 2002년 최연소 기초단체장(경남 거창군수)에서 2006년 최연소 광역단체장(경남지사)으로 직행한 김태호였다. 총리만 제대로 해내면 2년 뒤 곧바로 대권에 도전할 수도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하지만 정작 MB는 별 다른 설명이 없었다. 설명할 일도 아니었지만, 김태호도 물어보지 않았다.
김태호=“저, 3선 출마는 안 합니다.”
MB=“도지사 두 번 하고 그만두는 게 어디 있어!”
김태호=“도지사 두 번 했더니 머리가 텅 비어서 공부 좀 해야겠습니다.”
MB=“그래? (잠시 고민한 뒤) 잘 생각했어.”
MB=“갑자기 또 무슨 얘기야?”
김태호=“소장수 아들이 대통령하고 독대까지 했으면 출세한 거죠. 하하하.”
MB=“끝까지 마무리 잘해. 근데 우리(정치)도 하여튼 바뀌어야 해.”
하지만 김태호는 MB의 의중을 제대로 눈치채지 못했다. 다만 ‘아, 뭔가 나에게 기대를 갖고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느꼈다.
도지사 임기가 끝난 그해 7월 4일, 이번에는 MB가 직접 전화를 걸었다. 북중미 3개국 순방을 마치고 돌아온 뒤 곧바로 연락을 넣은 것이다.
MB=“청와대로 한 번 올라와.”
김태호=“죄송합니다. 빨리는 못 갑니다. 부모님, 장모님 모시고 백두산 가기로 일정이 잡혀 있습니다.”
MB=“(잠시 말이 없다가) 그럼 갔다 와서 전화해.”
김태호는 부랴부랴 백두산을 다녀온 뒤 그달 12일 청와대를 다시 찾았다. 이날도 MB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기억에 남는 MB의 메시지는 하나였다. “준비 잘해!”
임태희 대통령실장도 MB가 김태호를 총리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8·8개각 6일 전, 임태희는 김태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태희=“대통령이 (여름)휴가를 가면서 ‘잘 챙기라’고 했는데, 어느 부처에 갈 거야?”
김태호=“형님,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대통령께서 어느 부처에서 일하라고 하시면 최선을 다하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임태희=“….”
임태희는 당황했다. MB가 김태호에게 입각 언질을 주면서 정부 부처를 말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어떤 자리를 맡긴다는 것인가. 임태희는 부랴부랴 MB의 의중을 알아봤다. 그러곤 3일 뒤 김태호를 서울 웨스틴조선호텔로 급하게 불러냈다.
임태희=“대통령께서 총리를 하라고 하시는데….”
김태호=“(제 능력으로는) 하기 힘듭니다.”
임태희=“이 사람아, 못 한다고 하면 어떻게 해.”
김태호=“그러면, 형님이 총리라고 생각하고 저를 전폭적으로 도와준다고 약속해 주세요.”
임태희=“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당시 여권은 두 달 전 6·2지방선거에서의 사실상 참패로 말 그대로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텃밭인 경남에서 무소속 김두관 후보가 당선되는 등 민심이반이 뚜렷했다.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와 정정길 대통령실장이 사퇴했고, 6월 국회에서 세종시 수정안이 부결되자 정운찬 총리까지 사의를 표명한 상황이었다.
박형준 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의 기억. “대통령은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뒤 젊은 세대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젊은 리더그룹을 발탁하는 것이 좋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김 지사는 젊고 행정경험도 있고, 정치적 감각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통령이 (7월 12일) 따로 면담을 한 것이다.”
한마디로 ‘세대교체’를 염두에 뒀다는 얘기였다. 비슷한 시기 청와대 개편에서도 54세 동갑내기인 임태희 고용노동부 장관과 백용호 국세청장이 각각 대통령실장과 정책실장으로 발탁됐고, 한나라당에선 46세의 원희룡 의원이 사무총장으로 기용됐다. MB는 김태호를 총리로 지명함으로써 당정청의 세대교체 그림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임태희는 이렇게 설명했다. “나도 김 지사의 (총리) 발탁을 미리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나중에 대통령이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대선 때 틀림없이 민주당에서 부산·경남(PK) 출신의 후보가 나올 텐데, 그렇게 되면 (대구·경북 출신인) 박근혜 전 대표가 당의 대선후보가 되더라도 PK가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래에 (PK의) 기대를 모을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줘야 PK가 갈라지는 것에 대응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MB에게 김태호는 ‘박근혜 대항마’라기보다는 세대교체를 이룰 수 있는 ‘PK발(發) 기대주’라는 것이다.
MB정부 초대 대통령실장을 지낸 류우익의 증언도 일치한다. 류우익은 주중대사 시절 김태호에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김태호가 총리 후보자를 사퇴하고 중국에 머물며 심신을 달래고 있을 때였다. 류우익은 MB의 의중을 이렇게 전했다. “대통령은 김 지사가 총리로 거론되기 전부터 세대교체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한국 정치가 이대로 가면 한 발짝도 변화를 가져올 수 없고, 세대교체로 미래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임기 내내 말이 많았던 MB의 ‘탈(脫)여의도’도 사실 정치 자체에 대한 혐오감의 표현이라기보다 새 정치에 대한 갈망, 그리고 그런 갈망이 좀처럼 채워지지 않는 데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MB는 퇴임을 앞둔 2013년 2월 14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도 속내를 털어놨다. “정치 혐오 그런 것은 아니고, 나는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가 호남을 대표하는 민주당, 영남을 대표하는 여당 이런 게 얽혀서….”
MB는 ‘YS식 세대교체 바람’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1995년 10월, YS는 일본의 니혼게이자이신문과 인터뷰를 하면서 “(차기 대선에서는) 깜짝 놀랄 만한 세대교체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YS의 이 한마디로 정가의 시선은 온통 47세의 이인제 당시 경기지사에게 쏠렸다. MB도 그때 초선의원이었다. 그 역시 야망을 품고 정계에 입문했던 터라 YS의 ‘깜짝 놀랄 만한 젊은 후보’ 발언과 그 파장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YS의 세대교체 발언도 집권 3년차, 그러니까 임기가 반환점을 돌 무렵 터져 나왔고 MB의 ‘김태호 카드’도 비슷한 시기에 불거져 나왔다.
하지만 MB식 세대교체 실험은 채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김태호는 48세의 패기를 앞세웠지만 국회 인사청문회의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21일 만에 손을 들고 말았다. 너무 무모한 실험이었던 것일까.
김태호 자신도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최근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당시 우기면서 고(Go) 했으면 할 수도 있었겠지만 돌이켜보니 민폐를 많이 끼쳤을 것 같다. 그리고 공중에 붕 떠서 정치가다운 역할도 못하고 그만뒀을 수 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고 털어놨다.
김태호는 자진사퇴하기 며칠 전 서울 삼청동 인근에서 임태희를 만났다. “이번 토요일(8월 29일)에 사퇴할 겁니다. 지금 이후로는 어른(MB) 전화도 받지 않겠습니다.”
MB도 김태호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MB는 며칠 전 박근혜와 청와대 오찬 회동을 하고 ‘이명박 정부의 성공과 정권 재창출’에 합의한 상태였다.
고성호 기자 sung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