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 북파 민간공작원 김소웅씨 ‘침묵서약’ 50년 만에 입 열다
북파공작원 시절의 일을 처음으로 털어놓는 김소웅 씨.
당시 용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건달생활을 하던 그는 “평생 먹고살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고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따라나섰다. 진흙으로 번호판을 가린 지프를 타고 안대로 눈을 가린 채 한참을 달려가 내린 곳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에 있는 한 가옥.
“45구경 권총을 꺼내 실탄을 장전하더니 탁자 위에 탁 내려놓는 거야. 그리곤 ‘배신을 할 경우에는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그 어떤 처벌도 감수하겠다’는 서약서를 쓰라 하더라고. 북한에 침투한다는 말에 머리카락이 쭈뼛했지만 권총이 앞에 놓여 있으니 ‘못 하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지.”
“비탈지고 험한 길만 골라서 1시간에 10km를 주파하라는 거야. 처음엔 절반도 못 갔지. 그러면 그 추운 겨울에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가 5분 정도 있다 나오길 반복하는 기합을 받곤 했어. 죽을 고생이었지.”
불가능할 것 같았던 1시간 10km 주파가 가뿐해지자 곳곳에 지뢰와 모래장애물, 실(絲)장애물이 설치된 지형을 통과하는 훈련이 이어졌다. 집에 있는 날에는 독도법을 익혔다.
“1만5000분의 1 항공사진 위에 실체경을 올려놓고 보면 마치 현장을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입체감이 생생해. 매일 침투할 경로를 보면서 지형, 지물을 숙지하는 거야. 나중엔 어디에 소나무가 있는지, 민가 화장실 위치까지도 저절로 외워져. 그래서 실제 갔을 때는 처음 와본 곳이었지만 여러 번 온 것처럼 익숙하더라고.”
드디어 첫 임무가 떨어졌다. 황해도 개풍군 풍계리에 있는 남파간첩 침투 부대에 침입해 간첩 침투 루트가 적힌 서류나 사업지시서, 남판간첩명단 등을 절취해오는 것이었다.
“우리가 여기에 산다는 것을 북한군이 알았던 거야. 우리를 죽이러 왔다가 주인집 남자를 우리로 알고 목을 따간 거지.”
두 번째 작전은 요인 납치·암살. 하지만 침투 도중 북한군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다 겨우 탈출해 돌아왔다. 산비탈에서 미끄러져 수 십m를 구르는 바람에 머리가 깨지고 사금파리에 팔목이 크게 베었다. 그 후유증으로 지금도 그는 손가락 3개를 못 움직인다.
“평생 먹고살게 해주겠다고 하더니 더 일을 못하게 되니까 한 푼도 안주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거야. 집에 가 있으면 연락하겠다면서 무임승차권 한 장 주더라고. 연락은 무슨… 국가가 사기를 친 거지. 오히려 2km 밖으로 외출할 때마다 파출소에 신고해야 한대. 말 안하고 나가면 바로 찾아와서 간첩과 접선한 것 아니냐고 조사하고.”
이듬해엔 병역기피자라면서 군대에 끌려갔다. 더 기가 막힌 건 북한에 다녀온 것 때문에 신원조회에 걸려 취업, 출국 등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힘들다는 것이다. 2004년 북파공작원들에게 위로보상금을 지급할 때도 당국은 그에게 이중간첩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보상금 지급을 미루다 거칠게 항의하자 마지못해 내주었다고 한다.
최호열 신동아 기자 honeypapa@donga.com
*김소웅 씨의 생생한 북파공작활동은 시판 중인 신동아 8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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