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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리뷰]관객의 귀는 70분 내내 무대의 포로로 잡혔다

입력 | 2013-08-06 03:00:00

두 메데아 ★★★★☆




“남편에게 앙갚음하려면 아이들을 죽여야 해!” “안 돼. 도저히 그것만은 할 수 없어!” 연극 ‘두 메데아’는 복수심에 불타는 ‘아내’와 자식들을 보호하려는 ‘어머니’로 갈라진 한 여성의 두 자아를 대립시킨다. 극단서울공장 제공

에우리피데스는 시대를 잘못 타고 난 막장 드라마의 귀재였다. 고향 아테네를 도망치듯 떠나 기원전 406년경 마케도니아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시인 중 막내. 희곡 90여 편을 썼지만 생전에는 4편만이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대표작 ‘메데이아’에서 그는 신화 속의 자식 잃은 여인을 ‘제 손으로 두 아들을 살해한 팜파탈’로 재창조했다. 신화에서의 메데이아는 남편 이아손이 망명지 코린토스의 공주에게 새장가를 들려 하자 공주와 왕을 살해한다. 코린토스 사람들은 그 벌로 메데이아와 두 아들을 죽인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는 남편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찢어발기기 위해 자식들을 칼로 토막 내 살해하는 엽기 여성 캐릭터로 메데이아를 빚어 냈다. TV 드라마 ‘사랑과 전쟁’ 정도는 어린애 장난으로 만드는 막장 복수극이다.

자극적 상황 묘사에 집착한 단순한 복수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지난해 ‘메데이아’ 영문판을 번역한 송옥 전 고려대 교수는 “에우리피데스는 자아 속에서 비극의 원인을 찾으려 하는 개인에 주목했다. 전설과 신화 속의 인물을 실존하는 인간으로 재창조했다”고 썼다.

복수심에 사로잡혀 인간성을 던져 버리는 사례는 현실 세계에 차고 넘친다. 에우리피데스가 사후에 차츰 3대 비극 시인 중 최고봉으로 재평가된 것은 불타는 원념과 이성적 자제력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절묘하게 그려 냈기 때문. 그는 어느 쪽도 편들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없이 불편하지만 한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선사했다.

2010년 1월 미국 뉴욕 오프브로드웨이 초청 공연 이후 3년여 만에 다시 막을 올린 연극 ‘두 메데아’는 모성과 복수심으로 분열된 두 자아를 통해 메데이아 이야기를 재해석했다. “나는 이 일(복수)을 수행할 것입니다…. 오, 내 심장이여. 그런 짓을 하면 못쓴다. 가련한 마음아. 아이들을 살려 두어라….” 무대 가운데 홀로 서서 괴롭게 독백하던 메데이아는 슬픔에 빠진 어머니(구시연)와 성난 아내(이경) 두 캐릭터로 분리됐다.

갈등하고 대립하던 자아의 물리적 분열은 이야기를 더 명료하고 풍성하게 만들었다. 클라이맥스에서 칼을 빼든 채 고민하던 ‘아내 메데이아’는 먼저 ‘어머니 메데이아’를 찔러 없앤 뒤 자식을 난도질한다. 선과 악으로 갈라진 두 주인공의 육탄전을 흥미로운 볼거리로만 다뤘던 영화 ‘슈퍼맨3’(1983년)와는 격조가 한참 다른 시퀀스다.

연출가 임형택 서울예대 교수는 “올해 공연에서는 메데이아가 제 자식들을 죽여서라도 되돌려 보내고 싶어 한 태초의 순수를 표현해 내는 ‘소리’의 보강 작업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극 초반 배우들은 암전 속에서 촛불을 하나둘 밝히며 고요히 등장해 물방울 듣는 소리, 나무 스치는 소리, 조약돌 부딪는 소리를 차곡차곡 쌓아 ‘태초’를 다듬어 낸다. 결말부 씻김굿 뒤 마지막 촛불이 꺼질 때쯤, 인간의 소리를 지워 낸 공간이 덩그러니 남는다.

징, 가야금, 북, 클래식기타, 하모니카, 트럼펫 등 20여 개의 악기에 판소리를 얹어 정묘하게 조합해 귀를 꽉 붙들고 한시도 놓아주지 않는다. 들숨날숨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계산된 대사와 같다. 그 와중에 꿋꿋이 휴대전화를 끄지 않은 남성 관객. 70분 공연 중 유일한 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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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가현 김사련 이홍재 정한솔 출연. 15일까지 서울 대학로 게릴라극장. 2만5000∼3만5000원. 02-923-1810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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