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59세 장훙빙 변호사 “43년전 나를 반면교사로… ”
중국 문화대혁명 당시 어머니를 반혁명 분자로 고발해 처형되도록 한 장훙빙 변호사(오른쪽 사진)의 어릴 적 가족사진(왼쪽 사진). 장 변호사는 사진 속 오른쪽에서 두 번째로 아버지 옆에 서 있다. 장 변호사의 어머니 팡중머우 씨는 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 앉아 있는 여성이다. 장 변호사는 43년 전 자신이 저지른 패륜을 최근 공개적으로 참회했다. 사진 출처 신징보
59세의 장훙빙(張紅兵) 변호사는 7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발행되는 신징(新京)보와의 전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0년 어머니 팡중머우(方忠謀·당시 44세) 씨를 ‘반혁명 분자’로 군 당국에 고발했다. 팡 씨는 총살당했다. 문화대혁명의 광기 속에 자행된 숱한 패륜의 극단이었다.
당시 그는 16세의 홍위병이었다. 원래 이름인 장톄푸(張鐵夫)를 1966년 붉은 병사란 뜻의 훙빙으로 바꿀 정도로 골수분자였다. 1970년 2월 13일 안후이(安徽) 성 농촌마을에 있는 집에서 문화대혁명과 관련한 가족의 논쟁이 벌어졌다. 팡 씨는 “지도자(마오쩌둥)를 개인숭배해서는 안 된다. 류사오치(劉少奇) 편에 서겠다”고 말했다. 마오에 대한 비판은 당시엔 신성모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장 변호사는 “더이상 어머니가 아니라 인민의 적이었다”고 당시 심경을 토로했다. 장 변호사의 아버지도 “당신이 방금 쏟아낸 독설을 모두 글로 써라”고 요구했다. 그와 아버지는 군 당국에 팡 씨를 고발하며 이 글을 제출했다. 장 변호사는 “반혁명 현행범 팡중머우를 타도하자. 총살하자”라고 쓴 별도의 글도 제출했다. 그는 “현재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고 말했다. 군인들이 들이닥쳐 팡 씨를 폭행한 뒤 압송했고 두 달 뒤 총살했다. 이런 식으로 수십만 명이 처형됐다고 한다.
어머니가 숨진 뒤 후회가 몰려왔다. 장 변호사는 “수십 년간 반성을 멈춘 적이 없다. 마음속으로 ‘장훙빙, 장훙빙, 이 짐승만도 못한 놈아’라고 되뇌곤 했다”며 “도망가고 싶었지만 도망갈 곳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1976년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극도의 공포감이 밀려왔다. 우울증도 생겼다. 남들과 대화할 때 어머니처럼 자신도 모르게 정치관을 드러낼까 두려웠다. 아버지가 숨질 때까지 부자는 이 사건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수없이 꿈에 나타났다. 그는 꿈속에서 “어머니, 불효자가 무릎 꿇고 사죄드립니다”라고 애원했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어머니가 내게 벌을 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장 변호사는 속죄의 길을 걸어왔다. 어머니의 누명을 벗겨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1980년 7월 23일 안후이 성의 한 지방법원에서 팡 씨가 억울하게 처형됐다고 판결한다. 그 뒤 숨죽이며 살던 그가 이런 고백을 고민하기 시작한 때는 2009년이다. 인터넷에서 문화대혁명을 찬양하는 글을 본 뒤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 변호사는 “바진(巴金·1904∼2005·저명한 문학가)은 문화대혁명 박물관을 세워 구체적인 자료로, 가슴이 떨리고 혼이 나가는 충격적인 진실을 공개해 중국 땅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를 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며 “내가 바로 대표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그가 2011년부터 팡 씨의 무덤을 문화재로 지정받으려는 활동을 펼쳐 온 것도 이 때문이다. 장 변호사는 “세상은 나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베이징=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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