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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의 칼날에서 살아남은 오른팔의 역작

입력 | 2013-08-08 03:00:00

탄은 이정 불후의 시화첩 ‘삼청첩’에 숨은 이야기들




삼청첩 23면에 실려 있는 검은 비단 바탕에 금물(금니)로 그린 대나무. 서첩에는 매화와 난초 그림도 있으나 이정은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렸다. 간송미술관 제공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삼청첩(三淸帖)’은 탄은 이정(灘隱 李霆·1554∼1626)이 1594년 불혹(40세)의 나이에 엮은 시화첩이다. 세종대왕의 현손(玄孫·고손)인 이정은 감각적이면서도 절제된 서화를 그려 서예와 회화가 적절히 어우러진 조선 묵죽화의 전형을 세웠다고 평가받는다. 조선 중기 4대 문장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1564∼1635)는 “소동파의 신기와 문동의 사실성을 갖췄다”고 극찬했다.

이렇게 삼청첩이 조선 중기의 걸작으로 대접받는 데 비해 그간 이 서첩에 얽힌 역사적 뒷이야기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세 가지 맑음을 담은 책’이란 단아한 이름과 달리 삼청첩은 수차례 국란에 휘말리며 자칫 후대에 전해지지 못할 뻔했다. 최근 백인산 동국대 강사(44)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학술지 ‘문화재’에 실은 논문 ‘간송미술관 소장 삼청첩의 역사성에 대한 고찰’에서 이런 상황에 주목하고 서첩의 제작 배경과 전래 과정을 소개했다.

삼청첩은 제작연도에서 보듯 임진왜란(1592∼1598년)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얄궂게도 왜란이 서첩의 탄생에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탄은은 전쟁 발발 직후 왜군에게 칼을 맞아 오른팔을 크게 다쳤다. 자칫 목숨을 잃거나 작품 활동을 접어야 할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왕족으로서 한양 사람이던 그가 이후 충남 공주로 내려가 평생 머문 것도 이때 입은 상처의 영향으로 알려졌다. 백 강사는 “삼청첩은 탄은이 그런 개인적 국가적 시련을 극복하고 심기일전해 내놓은 필생의 역작”이라고 평했다.

이 때문에 삼청첩에는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려는 탄은의 심정이 오롯하다. 그림에서 풍기는 청량하고 엄정한 미감은 어려움에 굴하지 않는 조선 문인의 결기와 기상이 배어난다. 제작 기법도 전란으로 물자가 부족했을 시기임에도 엄청난 고가인 ‘흑견금니(黑絹金泥·검은 비단에 금을 물들여 그리는 방식)’ 화법을 사용했다. 그가 들인 정성을 짐작하게 한다.

탄은이 세상을 떠난 뒤 삼청첩은 선조의 부마인 무하당 홍주원(無何堂 洪柱元·1606∼1672)에게 넘겨진다. 탄은 집안의 가세가 기울었던 까닭인데, 경제력이 탄탄했던 홍주원은 탄은을 높이 샀던 이정구의 외손이기도 했다. 홍주원은 이 서첩을 끔찍이 여겼지만 곧바로 화마에 휩쓸려 소실될 위기를 겪는다. 바로 병자호란(1636∼1637년)이었다.

정혜옹주의 남편인 윤신지(尹新之·1582∼1657)가 서첩에 남긴 글에 따르면 당시 홍주원은 어가를 따라 피신했는데, 청나라에 함락돼 가재가 모두 불탔다. 모든 게 잿더미로 변해 남은 게 없었지만 천우신조로 단 하나 건진 게 삼청첩이었다. 실제로 남아있는 서첩을 보면 곳곳에서 불에 그슬린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후 어렵사리 살아남은 삼청첩은 홍주원 후손의 가보로 전해졌으나, 구한말 일본인의 손에 넘어가기도 했다. 정확한 과정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임오군란(1882년)을 틈타 인천에 상륙한 일본 순양함 닛신(日進)함의 쓰보이 고조(坪井航三) 함장 손에 떨어진 것. 서책 한쪽에도 쓰보이가 구입했노라 직접 쓴 글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이를 간송 전형필(1906∼1962)이 다시 사들여 겨우 국내에 남았다. 백 강사는 “삼청첩은 조선시대 대표적 환란을 두루 겪으며 그 사료적 가치가 드높아진 독특한 문화재”라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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