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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군국의 城, 야스쿠니

입력 | 2013-08-10 03:00:00


일본 도쿄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야스쿠니신사. 8월 15일이 다가오면서 참배에 나선 일본인들로 매일 붐빈다. 횡단보도를 지나 신사 정문으로 들어서면 배전(참배하는 장소), 본전(신을 모신 장소), 영새부 봉안전(명부를 보관하는 장소)이 일렬로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엔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 14명도 합사돼 있다. 아사히신문 제공

오른손을 깁스한 60대 일본인 할머니가 배전(拜殿·참배하는 장소) 앞에 섰다. 어렵사리 양손을 모아 합장을 하고 눈을 감았다. 손을 깁스했기 때문에 신사 참배 때 으레 하는 박수를 칠 수는 없었다. 남들의 ‘탁 탁’ 박수 치는 소리를 들으며 할머니는 합장했다. 약 1분 후 눈을 떴다. 두 번 절을 하고선 몸을 돌렸다. 3단 계단을 내려갈 때 몸이 기우뚱거렸다.

6일 일본 도쿄(東京)의 중심가인 지요다(千代田) 구 구단시타(九段下)의 야스쿠니(靖國)신사. 한국의 광복절이자 일본의 종전기념일인 8월 15일을 약 열흘 앞두고 신사에는 참배객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초등학생 아이를 데리고 참배하는 30대 부부, 양복 정장을 빼입은 40대 샐러리맨, 중절모를 쓰고 온 70대 할아버지, 여행 배낭을 멘 20대 연인…. 이날 정오부터 약 2시간 동안 신사를 찾은 참배객은 1000명이 훌쩍 넘었다. 이들은 왜 이곳을 찾는 걸까. 역사 왜곡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이곳이 일본인에게는 어떤 의미인 걸까.
▼ 가미카제 대원들 “야스쿠니에서 만나자” 외치고 출격 ▼

A급 전범도 야스쿠니의 신

“오∼, 오∼.”

밤 12시경 야스쿠니신사는 신관(神官)이 내는 소리에 파묻혔다. 신사 관계자가 영새부(靈璽簿·신으로 모시는 사람들의 명부)를 본전(本殿·신이 모셔져 있는 장소) 한가운데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영새부에는 신으로 모실 전몰자의 이름, 사망 장소, 사망 날짜 등이 적혀 있다.

야스쿠니신사의 어신체(御神體·신령이 머무르는 장소. 신사에 따라 거울, 칼, 구슬, 돌, 나무 등 다양하다)는 대검이다. 대검은 본전에 놓여 있다. 영새부를 본전에 둠으로써 영새부에 적혀 있던 ‘인간의 혼령’은 대검 속에 들어가 ‘신령’이 된다. 즉, 합사(合祀·둘 이상의 혼령을 한곳에 모으는 것)가 된 것이다. 이런 장면은 일반인이 좀처럼 보기 어렵다. 의식을 지켜본 일본 월간지 세이론(正論·2005년 8월호)과 같은 언론에 묘사돼 있을 뿐이다.

야스쿠니신사 본전 정문은 항상 닫혀 있는데 추계대제 첫날 행사 때는 특별히 열린다. 이때 영새부를 본전 뒤에 있는 봉안전(奉安殿)에 두는 의식을 치른다.

영새부 봉안전은 야스쿠니신사에만 있다. 전몰자를 신으로 모시기 때문에 신의 수는 전쟁과 비례해 가파르게 늘어나기 마련. 애초 본전에 영새부를 뒀지만 너무 많아지다 보니 영새부를 보관하는 봉안전을 1972년에 별도로 지었다.

현재 야스쿠니신사가 모시는 신의 수는 246만6000여 명. 이 중 태평양전쟁 전몰자가 213만여 명으로 대부분을 차지한다. 야스쿠니신사가 펴낸 ‘야스쿠니의 기도’ 책자를 보면 합사 대상자는 군인과 군속(軍屬·군 업무를 보는 사람)뿐만 아니라 소련(현 러시아) 만주 중국 등에 억류돼 사망한 사람,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징용돼 사망한 사람, 오키나와 전투에서 사망한 일반 주민 등이다.

이처럼 폭넓게 합사 대상을 정해 놓다 보니 간호사, 학생, 군수 노동자와 민간인 등도 영새부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1945년 6월 오키나와 전투 때 사망한 만 2세의 아기도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

실제로 신사를 참배하는 일반인 중 대다수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형제, 아버지, 할아버지, 친척, 혹은 이름 모를 애국자에게 감사와 추모의 마음을 전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기자가 야스쿠니신사에서 만난 수많은 일본인의 표정과 말에서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합사 대상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경우 육군성과 해군성이 결정했는데 1945년 전쟁이 끝나면서 더이상 전몰자가 나오지 않자 합사 결정 부처도 필요 없게 됐다. 하지만 합사에서 누락되거나 새로운 특례를 적용해 합사 대상이 된 사람을 뒤늦게 합사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경우 야스쿠니신사는 후생노동성에서 자료를 받았다.

2차 대전 당시 A급 전범 14명을 극비리에 합사한 것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1978년 야스쿠니신사는 당시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분류돼 사형되거나 옥중에서 사망한 14명의 전범을 ‘쇼와(昭和) 시대의 순난자(殉難者)’라는 이름으로 합사했다. 한국과 중국이 문제 삼는 대목도 바로 이 부분이다.


공포에 대한 마취제

“야스쿠니에서 다시 만나자.”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뚜렷하던 1944년 말 가미카제(神風) 자살특공대원은 이 말을 남기고 전장으로 떠났다. 전투기를 타고 적의 군함에 돌진하는 군인들은 ‘야스쿠니의 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없앴다.

사쿠라(櫻·벚꽃)도 공포에 대한 ‘마취제’ 역할을 했다. 활짝 피었다가 며칠도 안 돼 비처럼 꽃잎을 날리며 지는 사쿠라는 봉건시대 무사도의 상징이었다. ‘꽃은 사쿠라요, 사람은 사무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무사들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순간 사쿠라가 아름답게 떨어지듯 주저 없이 죽음을 택했다.

야스쿠니신사와 사쿠라는 태평양전쟁에서 한창 유행했던 군가 ‘동기(同期)의 사쿠라’에서 함께 만난다.

‘너와 나는 동기의 사쿠라. 같은 군사학교 교정에 피었네/핀 꽃은 지는 법. 나라를 위해 멋지게 지자/ (중략) /너와 나는 동기의 사쿠라. 따로따로 지더라도/꽃의 고향 야스쿠니신사. 봄에 피어 다시 만나자.’

지금도 도쿄에서 사쿠라가 피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표본목(標本木)은 야스쿠니신사에 있다.

야스쿠니신사의 전신은 1869년 6월에 지은 초혼사(招魂社)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전년도에 메이지 일왕을 떠받드는 정부군과 쇼군(將軍)을 정점으로 하는 막부(幕府·무사 정권)는 1년 이상 내전을 벌였고 결국 정부군이 승리했다.

일왕은 에도(江戶·현재의 도쿄)에 사당을 지어 사망한 정부군 병사 3588명을 위해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 이후 전몰자의 영령은 모두 초혼사에 안치됐다. 초혼사는 1879년 6월 국가(國)를 평안(靖)하게 한다는 의미의 야스쿠니(靖國)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일본에서 신사 수는 2012년 말 기준으로 약 8만1000개로 편의점 수(약 5만 개)보다 훨씬 많다. 그러다 보니 신사에도 레벨이 생겼다. 신화에 나오는 신이나 일왕의 제사를 지내는 신사를 관폐사(官幣社)라고 하고 으뜸으로 친다. 야스쿠니신사는 일반인의 제사를 지내지만 관폐사와 같은 별격(別格)관폐사의 지위를 부여받고, 일왕의 문양인 국화꽃도 사용한다.

일왕의 관심은 각별했다. 메이지(明治·1867∼1912) 일왕은 모두 합해 11회 참배했고, 요시히토(嘉仁·1912∼1926) 일왕은 5회, 히로히토(裕仁·1926∼1989) 일왕은 54회 참배했다. 아키히토(明仁·1989∼현재) 일왕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일왕의 참배는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전쟁에서 세 아들을 잃은 한 산골 주부의 소감을 실은 여성 잡지인 ‘주부의 벗’ 1944년 1월호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황송하게도 천황 폐하(일왕)께서 친히 참배하시는 모습을 엎드려 보았다. 우리 같은 천한 산골 출신은 죽어도 산속 너구리조차 울어주지 않는데 나라를 위해 죽었다고 천황 폐하까지 참배해주시는 것을 보고 감전된 것처럼 기쁨과 고마움을 느꼈다.”

결국 야스쿠니신사는 ‘전사→야스쿠니 합사→일왕 참배→징병→새로운 전사’와 같은 사슬 구조를 떠받치는 전당이 된 것이다.


전쟁을 미화하는 ‘유슈칸(遊就館)’

야스쿠니신사 배전 옆에는 유슈칸이라는 전쟁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1882년 문을 연 이곳은 막부 말기부터 2차 대전까지 수집한 유품 약 10만 점을 모아 놓았다. 이 박물관은 전쟁 미화의 핵심 역할을 한다.

7월 26일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책임연구위원과 함께 이곳을 찾았다. 입구에는 ‘대동아전쟁 70년전(展)’이란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특별전 이름부터 눈에 걸린다.

일본은 1941년 말 아시아 침략을 시작하며 “서양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려면 일본을 중심으로 대동아공영권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동아전쟁이란 말에는 침략 전쟁이 아니라 식민지 해방전쟁이라는 일본 우익의 시각이 담겨 있다.

특별전시회장 입구에는 태평양전쟁 작전도가 걸려 있다. 가로 세로 각각 1m가 넘는 대형 지도에 일본을 한가운데 놓고 일본이 침략했던 지역과 작전명이 곳곳에 표시돼 있다. 동으로는 진주만 공격(1941년 12월 8일), 북으로는 만주 방위작전(1945년 8월 9일)…. 일본은 태평양전쟁 때 아시아 여러 국가를 침략했다. 하지만 지도는 ‘작전도’라는 이름을 사용해 ‘침략’이라는 뉘앙스를 모두 지웠다. 오히려 일본이 전 세계를 지배한 듯한 인상을 줬다.

작전도 바로 옆 브라운관에선 ‘서구 열강이 앞다퉈 아시아를 식민 지배할 때 일본이 나서 아시아를 해방시키려 했다’는 설명이 나왔다. ‘아시아 침략’이 ‘해방’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일본의 과거 침략사를 합리화하는 표현은 여러 곳에서 발견됐다. 태평양전쟁을 설명하며 ‘아시아 민족의 독립이 현실로 된 것은 대동아전쟁에서 일본군의 빛나는 승리 후였다. 일본이 패한 뒤 각국은 독립전쟁 등을 거쳐 민족국가가 되었다’고 돼 있었다. 일본군의 아시아 침략이 민족국가 수립을 앞당겼다는 해석이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특별전시회에 놓여 있던 방명록을 들춰봤다.

“대일본제국 만세”(사쿠마·佐久間)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1년에 한 번 국민의 의무로 해야 합니다. 일본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와다 준코·和田順子)

“아름답고 뛰어난 일본을 되찾자. 일본 국민 한 명 한 명의 손으로.”(사가 현·佐賀縣)
▼ 신사 측, 한국인 합사 철폐 요구에 “신의 영역” 거부 ▼

2005년 8월 15일 아베 신조 당시 자민당 간사장 대리(앞줄 왼쪽)가 야스쿠니신사에서 참배를 마치고 나오고 있다. 아베 총리는 ‘야스쿠니신사 참배론자’이지만 총리가 된 뒤로는 한 번도 참배하지 않았다. 아시히신문 제공

그렇지만 포화로 숨진 부모 시신 옆에서 우는 아이의 사진 등 전쟁의 참상이 전시된 다른 전쟁박물관을 다녀가는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전쟁이 무섭다. 절대 다시 일어나선 안 된다”고 말한다.

장 위원은 “야스쿠니신사와 유슈칸의 역사 인식은 왜곡 교과서를 펴내고 있는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과 비슷하다. 역사교과서뿐 아니라 유슈칸의 전시물에서도 잘못되고 왜곡된 내용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8·15 일본 총리의 참배=침략 정당화

야스쿠니신사는 8월 15일을 전후해 한국 중국 일본 간 외교전쟁의 불씨를 제공하는 현장이다. 일본의 지도자들이 A급 전범까지 합사돼 있는 야스쿠니신사를 찾아와 침략전쟁 과정에 목숨을 잃은 조상에게 공식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행위에 대해 침략 받은 피해 국가들이 침묵할 수는 없는 일.

8월 15일엔 야스쿠니신사의 방명록과 주차장이 유독 주목을 받는다. 일본 총리와 각료들이 방명록에 무슨 내용을 적고 어떤 직함을 사용하는지, 총리가 관용차를 타고 오는지, 수행원은 데리고 오는지가 참배의 성격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총리가 개인 자격으로 참배했는지, 공식적으로 방문했는지를 판가름하는 선례는 1975년 8월 15일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총리가 만들었다. 그는 도쿄 무도관에서 열린 전국 전몰자 추도식에 ‘총리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어 야스쿠니신사에 ‘개인 자격’으로, 무명용사의 유골이 납골돼 있는 도쿄 지도리가후치(千鳥ケ淵)의 전몰자 묘원에는 ‘총리 자격’으로 각각 참배했다.

법률 해석 기관과 야권에서 반발이 일었다. 당시 미키 총리는 “참배 방명록에 총리 직함을 기재하지 않았다, 총리 관용차를 사용하지 않았다, 공식 수행원을 동행하지 않았다, 공물(供物)을 공적인 비용으로 하지 않았다” 등 4가지 이유를 들어 공식 참배가 아니라고 주장해 논란을 잠재웠다. 그러자 후임 총리들이 하나둘 8월 15일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기 시작했다. 애초 ‘개인 자격’을 강조했지만 그 성격도 점차 총리 공식 자격으로 근접했다.

그런데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는 1985년 사상 처음으로 총리 자격임을 밝히고 종전기념일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나카소네 공식 참배’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과 중국은 총리 참배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총리가 공식 자격으로 참배하자 전쟁 피해 국가들이 거세게 항의했다. 그 후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총리가 1번, 고이즈미 총리가 6번이나 참배하긴 했지만 나머지 총리들은 재임 기간 신사 참배를 하지 않았다.


새로운 갈등… 한국인 합사

7월 24일 오후 4시 도쿄 지요다 구 도쿄고등법원 101호 법정.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 유족들이 청구한 재판이 열렸다. 무산(むさん)법률사무소 오구치 아키히코(大口昭彦) 변호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헌법 20조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의 문제입니다. ‘너는 일본을 위해 싸웠다’는 이유로 야스쿠니신사에 한국인을 합사하면 일반 한국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합사 철폐는 당연합니다.”

재판관은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한마디 던졌다. “10월 23일 오후 2시에 판결하겠습니다.”

야스쿠니신사에는 현재 한국인 전몰자 약 2만1000명이 합사돼 있다. 합사 이유에 대해 신사 측은 “당시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 홈페이지에는 ‘야스쿠니신사는 당시 일본인으로서 싸운 대만과 조선반도 출신의 신령에게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신분, 훈공(勳功), 남녀 구별 없이 평등하게 모시고 있다’고 적혀 있다. 시혜를 베푼다는 투다.

한국인 유족들은 2001년 6월과 2007년 2월 각각 도쿄지방법원에 한국인 합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묻고 합사 철폐를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일제에 징용돼 강제로 전쟁터에 끌려 나가 죽음을 맞았는데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것은 치욕이라는 주장이다.

1946년 10월 조선성명복구령에 따라 창씨개명이 무효화됐지만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은 아직 창씨개명된 상태다. 예를 들어 일본 육군 대위로 1945년 5월 오키나와 부근에서 전사한 탁경현 씨는 미쓰야마 히로부미(光山博文)라는 이름으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돼 있다. 2001년 소송의 경우 지방법원과 고등법원, 대법원에서 모두 기각됐다. 2007년 소송은 현재 고등법원에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야스쿠니신사 측은 합사 철폐 요구에 대해 “사망자의 이름이 올라와 있는 영새부는 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어떤 표기도 수정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한국인 유족들은 속이 탄다. 5월 29일 도쿄고등법원에서 진행됐던 구두변론에서 원고 이희자 씨가 제출한 진술서에 한국인 유족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저는 야스쿠니신사에 갇혀 있는 제 아버지의 이름을 지워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죽은 사람을 살려 내라거나 야스쿠니신사를 없애 달라는 게 아닙니다. 일제 식민지 지배로 인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없이 자라온 딸이 그 피해를 일으킨 당사자인 일본 국가와 야스쿠니신사에 요구하는 것치고는 소박한 것 아닌가요.”


부침(浮沈)의 역사와 갈림길

도쿄 한복판에 자리를 틀고 있는 야스쿠니신사는 침략전쟁에 대한 일본 우익의 강경한 입장을 상징하는 난공불락의 성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 시설도 일본의 부침에 따라 운명이 크게 바뀌어 왔다. 67년 전인 1946년만 해도 야스쿠니신사는 국가 시설에서 일개 종교법인으로 전락했다. 당시 미군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신사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끊게 만들었다. 전쟁을 미화했던 유슈칸도 폐쇄시켰다. 종교법인이 된 야스쿠니신사는 각종 제사를 자비로 지내야 했다.

그러자 전사자 유족들이 반전을 시도했다. 1947년 11월 ‘일본 유족 후생연맹(이후 일본 유족회로 개명)’을 결성한 뒤 일본 정부에 유족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했다. 2007년 9월 도쿄 도 신주쿠(新宿) 구 일본청년관 대강당에서 열린 유족회 창립 60주년 기념행사에는 일왕 부부가 처음으로 참석했다. 유슈칸도 다시 문을 열었다. 그만큼 유족회의 지위가 높아진 것이다.

그동안 야스쿠니신사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들이 여러 차례 나왔다. 1985년 8월 나카소네 총리의 공식 참배 이후 국제사회의 비판이 일자 ‘A급 전범 분사론’이 자민당과 유족 일부에서 제기됐다. 하지만 야스쿠니신사는 교리상 A급 전범만 따로 떼어내 모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거부했다. 그 경우 한국인 합사자 등에 대한 요구에도 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야스쿠니신사 이념 자체가 붕괴될 우려가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국립 추도시설을 짓자는 논의도 있었다. 고이즈미 총리는 2001년 8월 참배에 대한 비판을 무마하기 위해 야스쿠니신사 및 전몰자 묘원과 다른 새로운 추도시설을 만드는 방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일본유족회와 야스쿠니신사 측의 반대로 제대로 논의가 진전되지 않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올해 5월 국회에서 정부가 새로운 국립 추도시설을 건설하는 데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야스쿠니신사발(發) 외교 갈등이 예상된다. 아베 총리는 6일 히로시마(廣島)에서 개최된 평화기념식에 참석한 후 기자들에게 “각료가 개인으로 야스쿠니신사에 참배할지는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자유다”라고 말했다.

전쟁 피해 국가들의 목소리는 그의 귀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올해 4월 “한국의 항의는 김대중(대통령) 시대에도 조금은 있었지만 노무현(대통령) 시대에 들어 현저해졌고, 중국도 이른바 A급 전범을 합사했을 때에는 항의하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 배경이 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꺼내기도 했다.

총리가 이런 말을 하자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행정개혁담당상,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자민당 정조회장 등 일부 각료와 의원들은 공개적으로 8·15 참배 의사를 밝혔다.

동아일보는 이번 특집 기사를 준비하면서 야스쿠니신사와 유족회 간부들에게 지난달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지만 유족회 측은 임원회의를 통해 인터뷰에 응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6일 알려왔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수십 년째 동북아 역사 갈등의 뇌관, 과거사 왜곡의 상징이 되어버린 야스쿠니신사가 그 고즈넉한 풍경처럼 평범한 일본의 한 전통시설로 되돌아갈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

도쿄=박형준·배극인 특파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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