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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장강명]진격의 거인, 無力의 힘

입력 | 2013-08-12 03:00:00


민주당 배재정 대변인이 7일 브리핑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진격의 거인’이라고 비판했다. 야당을 대화 상대로 여기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진격’한다는 풍자였다. 개인적으로는 이날 브리핑 내용보다 ‘진격의 거인’이라는 비유에 더 관심이 갔다. 저 만화가 이제 정당 브리핑에까지 등장할 정도로 유명해졌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배 대변인은 ‘진격의 ○○’이라는 간판을 여러 번 보고 보좌진에게 뜻을 묻다가 이 만화를 알게 됐다고 한다.

▷일본 만화인 ‘진격의 거인’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매력은 있지만 소수의 마니아에게나 어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림이 유려한 것도 아니고, 잔혹한 묘사와 극도로 패배적인 정서 때문에 어느 선 이상으로 독자층을 넓히긴 힘들어 보였다. 그런데 웬걸, 10권(일본은 11권)까지밖에 나오지 않은 이 만화가 한일 양국에서 신드롬이 돼 가고 있다. 팬들은 사회학적 분석에 거부감을 갖는 모양이지만 이쯤 되면 시대의 공기(空氣)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이 만화를 관통하는 차별적 키워드는 ‘무력감’이다. 별 이유도 없이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 때문에 인류가 멸종 위기에 처했다는 설정도 그렇고, 주인공 일행이 거인과 벌이는 개별 싸움의 묘사도 그렇다. 극중에서 거의 모든 사람은 거인과 싸울 마음 자체가 없고, 그나마 거인에게 맞서는 주인공의 동료들은 공포에 떨다 허무하게 죽어나간다. 평범한 소년이 적과 싸우면서 점점 강해지고 새로운 친구도 만난다는 격투만화의 공식이 이곳에는 없다.

▷“(우리 처지는) 마치 가축 같잖아” “이 분노의 칼끝을 어디에 겨눠야 할지” “어쩔 수 없잖아? 세상은 잔혹하니까” “최소한 뭔가 의미가 있길 바랐어”…. 만화 속 대사들이다. 무력감은 여러 층위에 걸쳐 있다. 인류의 지배계층은 거인의 탄생에 얽힌 비밀을 숨기고 있는데, 비밀의 정체에 따라서는 거인과의 싸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주인공은 “뭐가 뭔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진저리가 난다”고 내뱉는다. 이 만화에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도 만화 속 주인공처럼 무력하다고 느껴서일까.

장강명 정치부 기자 tesomio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