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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S 만난 박정희 “이 이야기는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

입력 | 2013-08-12 03:00:00

[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88>영수회담




1975년 5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오른쪽)과 영수회담을 하고 있는 신민당 김영삼 총재. 동아일보DB

YS와 박정희 대통령 간의 감정의 골은 이미 1975년부터 깊어져 있었다. 시계를 그때로 잠시 돌려보자.

베트남 패망(75년 4월 30일)이 임박한 4월 23일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박 대통령과의 회담을 제의한다. 총재 취임 후 8개월 만이었다. 베트남이 공산화될 경우 국제 정세가 국내 정치에 미칠 파급효과를 생각한 그는 “박 대통령과 흉금을 터놓고 의견을 나누려 한다”며 여야 영수회담을 취임 후 처음 제안한 것이다.

회담이 성사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가까이나 지난 5월 21일이었다. 장소는 지금은 허물어지고 없는 일제 총독 관저, 당시 대통령 집무실이었다.

김 총재는 박 대통령과 단둘이 앉았다. 김 총재가 먼저 1년 전에 타계한 육영수 여사에 조의를 표하는 말로 입을 열었다. 김 총재는 2000년 펴낸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서 이날의 대화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박정희는 나의 위로 인사를 받자 망연한 표정을 짓더니 창밖의 새를 가리키면서 “김 총재, 내 신세가 저 새 같습니다”라고 하고는 앞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것이었다. 느닷없는 행동이었지만 그 모습을 보니 나는 인간적으로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대통령은 울적해진 마음을 이내 추스른 듯 아시아지도를 꺼내놓고 김 총재에게 한반도와 주변 정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설명이 끝나자 김 총재가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어조로 “민주주의 합시다. 대통령 직접선거를 합시다”라며 “유신헌법을 빨리 철폐하여 멋진 민주주의를 하자” 거듭 말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김 총재” 불러놓고는 한동안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김 총재, 나 욕심 없습니다. 집사람은 공산당에 총 맞아 죽고 이런 절간 같은 데서 죽기 살기로 오래 할 생각 없습니다. 민주주의 하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다시 김 총재의 회고다.

‘박정희가 울지만 않았다면 나는 “그럼 언제 (민주주의) 할 거냐”고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눈물 때문에 그를 추궁하려던 나의 마음은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꼭 민주주의를 하겠습니다”라는 그의 말은 “이번 임기를 마지막으로 꼭 물러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때의 분위기가 그랬다. 비명에 타계한 아내를 들먹이며 눈물을 보이고 인생의 허망함을 털어놓은 뒤라서, 나는 그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박 대통령은 뒤이어 YS에게 “이 이야기는 절대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합시다”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도 한다.

“조선 놈들은 문제가 있어요. 내가 정권을 내놓는다고 미리 알려지면 금방 이상한 놈들이 생겨날 겁니다. 대통령으로 일하는 데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다시 김 총재의 회고다.

‘권력 누수를 우려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유신헌법으로 선출된 박정희의 임기는 당시(75년) 2∼3년 정도 남아 있었다. 나는 오랜 고통에 시달려온 우리 국민이지만 민주주의만 된다면 그 정도는 희망을 갖고 참을 수 있지 않겠나 생각했다. 그래서 “비밀을 지켜주마”고 약속했다.’

김 총재는 이튿날 5월 22일 중앙당사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국정 전반의 모든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 격의 없는 충분한 의견교환을 했다”고만 밝히고 “대통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서 다 털어놓고 얘기하지 못하는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당장 당내 비주류를 중심으로 총재를 향해 ‘밀약’이니 ‘야합’이니 하는 비난이 나왔다. 다시 김 총재의 말이다.

‘79년 10·26이 날 때까지 나는 당시 회담 내용에 대해 함구했다. 세간에는 밀약설이 나돌았지만 나는 약속을 지켰다.…하지만 박정희는 “민주주의를 하겠다”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때 (내 앞에서) 흘린 눈물이며 말(言)은 지금 생각하면 처음부터 나를 속이려고 꾸며낸 거짓이었다.’

“영수회담 때 보여준 박 대통령 모습이 진실이기를 기대했었다”는 김 총재의 기대는 이내 배신감으로 무너진다.

빌미는 영수회담 석 달 뒤인 75년 8월 23일 총재 취임 1주년에서 한 김 총재의 기자회견 발언이었다. 이날 김 총재는 “개헌 논의를 금하고 있는 긴급조치 제9호를 해제하라”고 촉구했다. 그런데 검찰이 몇 시간 뒤 “발언 일부가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으니 불구속 입건하겠다”고 밝히며 이튿날 바로 출두요구서를 발부한 것. 이어 9월 10일에는 비서실장 김덕룡까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한다. 제1야당 총재에 대한 소환장 발부와 비서실장 구속은 당시 분위기로서는 누가 봐도 청와대와 사전 협의 없이는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김 총재의 회고다.

‘검찰은 내게 몇 차례나 소환장을 더 보내왔지만 나는 무시했다. 그러자 하루는 유치송 사무총장이 집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중앙정보부 국장이 하는 말인데 한 번만 검찰에 자진 출두해 체면만 세워 주면 김덕룡을 내놓겠다”는 것이었다.’

연말 성탄을 맞아 김덕룡을 면회하고 온 뒤 마음이 약해진 김 총재는 유 총장에게 “정말 틀림없나” 확인하고는 75년 12월 30일 검찰총장실로 자진 출두했다. 하지만 검찰은 김덕룡을 내보내기는커녕 오히려 김 총재를 이듬해인 76년 1월 21일 불구속 기소해 버린다.

김 총재는 이즈음 최대의 정치적 위기 상황으로 몰린다. 영수회담 이후 반유신 투쟁의 날이 약해졌다며 비판을 받아오다 76년 9월 16일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빼앗기고 총재직에서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2년 전 악전고투 속에서 쟁취한 당권을 허무하게 빼앗긴 그는 이후 당직이 없는 전 총재에다 소수파로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후 당 운영 문제에 대해 일절 함구하며 깊은 침잠의 세월을 보낸다.

그러나 그동안 공고해 보이던 유신독재 체제는 서서히 균열이 가고 있었고 민심은 폭발 직전의 비등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YS에게 78년 12월 총선에서 신민당이 공화당을 사실상 이겼다는 소식은 새로운 결의를 다지게 했다. 그는 “이제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79년 새해가 밝았다. 그의 예감대로 ‘때’가 오고 있었다. 박 대통령과의 재결전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게 물러설 YS가 아니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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