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관 KOTRA와 미술가 한젬마씨가 손잡았더니
《“저희 사옥에 갤러리를 새로 여는데….” 설치미술가 한젬마 씨(43·여)는 지난해 9월 초 전화를 받았다. KOTRA 직원이었다. 그는 KOTRA 창립 50주년을 맞아 서울 서초구 염곡동 본사에 ‘오픈 갤러리’를 마련한다며 한 씨에게 명예관장을 맡아 달라고 제안했다. 여러 기업들과 함께 전시 프로젝트를 추진해 본 경험은 많지만 공공기관의 제안은 다소 의외였다. 한 씨는 단지 이름만 올려놓는 ‘얼굴마담’ 같아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만나기로 하고 며칠 뒤 KOTRA 본사를 찾았다.》
지난해 12월 KOTRA 오픈 갤러리에 전시된 작가 김석 씨의 ‘로봇태권브이’. 중소기업 유진로봇은 이 작품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제품 마케팅에도 활용하는 ‘매칭기업’으로 참여했다.
“너무 낡은 트렌드예요.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이 갤러리를 열어 사회에 공헌한다는 건 이미 10년 전에 유행했던 일입니다.”
3월 KOTRA 오픈 갤러리에서 열린 ‘중소기업 라이프전’ 관람객들이 전시작품을 둘러보고 있다. 가정집 내부처럼 꾸민 공간에 그릇, 냄비 등 중소기업 제품을 배치해 친숙함을 느끼게 했다. KOTRA 제공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중소기업 제품을 예술작품의 소재로 활용해 가치를 높여보겠다는 한 씨의 생각을 정작 중소기업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담당자에게 협조를 구하면 “회사 규모가 크지 않아서…”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속내는 추가 비용이 들어갈 것을 걱정해서였다.
한 씨는 그럴수록 이번 기회에 사회공헌과 예술을 바라보는 기업들의 인식을 바꾸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렵사리 몇몇 기업의 협조를 얻어 비누, 유리테이프 같은 제품들을 받아왔다. 한 씨의 취지에 공감한 작가들은 이 제품들을 소재로 그럴 듯한 예술품을 만들어냈다.
전시회 첫날 KOTRA의 초청을 받은 중소기업 대표들은 자사 제품들이 멋진 예술작품으로 탈바꿈한 것을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씨는 “예술가들이 흔히 소재로 삼는 나사, 붓, 끈이 중소기업 제품인 것처럼 예술가와 중소기업은 끈끈하게 연결돼 있다”며 “이제 예술을 자선활동 수단이 아닌 마케팅 관점으로, 예술가들을 문화투자의 파트너로 봐 달라”고 당부했다.
설치미술가 한젬마 씨(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오영호 KOTRA 사장(오른쪽)과 관람객들에게 전시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KOTRA 제공
“KOTRA는 바싹 마른 스펀지 같아 어떤 내용이든 쭉 빨아들일 수 있는 흡수력을 지닌 곳이더군요. 앞으로도 예술과 기업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계속해 볼 생각입니다.”
박창규 기자 ky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