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홍찬식 칼럼]금난새의 애국가

입력 | 2013-08-14 03:00:00

농어촌 청소년오케스트라의 감동적인 서울 공연
잘츠부르크에서 인정받은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
음악이 사회와 인생을 바꾸는 희망과 가능성 보여주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음악이 개인의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 화두는 1975년 베네수엘라의 빈민가에서 처음 제시된 이후 세계 문화계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음악가이자 경제학자인 호세 아브레우는 도시 뒷골목의 청소년들을 모아 손에 악기를 쥐여주고 오케스트라 연습을 시켰다. 특기 교육이나 정서 함양 같은 고상한 목적이 아니었다. 청소년들을 마약과 범죄로부터 구하겠다는 절실한 동기가 작용했다. 전과 5범을 포함한 11명의 아이를 상대로 시작한 음악 교육은 오늘날 베네수엘라 전역의 200여 개 지부에서 35만 명이 참여하는 성공 사례로 발전했다. 이른바 엘 시스테마 운동이다.

베네수엘라의 치안 상황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기적의 오케스트라―엘 시스테마’(2008년 제작)에 출연한 어린 학생은 “여긴 너무 위험해요”라며 말문을 열었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열여섯 살만 되어도 마약을 하고 총을 들고 다녀요. 그러다가 몇 달 뒤에 총에 맞아 죽지요. 거리에선 총격전이 자주 벌어집니다. 저는 총소리만 나면 집으로 숨어요.”

엘 시스테마 운동은 여러 나라로 확산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문화체육관광부와 교육부가 2010년 이후 각각 ‘꿈의 오케스트라’와 ‘학생 오케스트라’ 사업을 벌이고 있다. 농어촌희망재단에서도 농어촌 지역 20곳을 선정해 지역마다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최근 엘 시스테마와 관련된 국내외 활동을 직접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11일 국내 한 영화관에서 생중계한 베네수엘라 국립 청소년교향악단의 연주회는 감동적이었다. 엘 시스테마를 통해 육성된 청소년 연주자 250명으로 구성된 이 교향악단은 유럽의 여름 음악축제에서도 손꼽히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초청됐다. 세계 변방의 소외 계층으로 이뤄진 오케스트라가 당당하게 중심 무대에 진출한 것이다.

단원 중에는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어린이도 있었으나 지휘자 사이먼 래틀의 손끝에 주목하는 눈초리들은 예리하고 진지했다. 잘츠부르크의 청중은 연주회가 끝난 뒤 10여 분 동안의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거장 사이먼 래틀이 객석에 있던 엘 시스테마의 창립자 아브레우를 찾아가 포옹하는 장면이었다. 엘 시스테마의 성과가 세계에서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이튿날인 12일 서울의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는 농어촌희망재단이 창단한 청소년오케스트라의 연주회가 열렸다. 이 재단이 지원하는 20개 지역 오케스트라에서 10명씩 선발해 합숙 훈련을 거쳐 공식 연주회를 갖는 자리였다. 연주회 시작을 앞두고 몹시 긴장해 있던 학생들은 마지막 곡인 드보르자크의 신세계 교향곡을 무사히 마치자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휘자 금난새 씨는 마이크를 잡고 학생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양구” “괴산” “단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금 씨는 청중에게 “이번 연주회가 아이들에게 평생 아름다운 추억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해줄 것”이라고 말하며 앙코르 곡으로 애국가를 택했다. 객석을 가득 메운 청중은 일제히 일어나 함께 애국가를 불렀다. 금 씨는 281명의 단원이 모두 퇴장할 때까지 무대에 남아 그들에게 뜨겁고 긴 박수를 보냈다.

베네수엘라와 한국은 사회 현실에서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지역사회와 개인의 변화를 모색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빈부의 차이는 결국 문화적 격차로 이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어릴 적부터 독서 공연 미술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 체험을 하며 성장한 아이들은 그렇지 못한 아이들과는 살아가는 방식, 삶에 대한 태도부터 다를 것이다.

농어촌희망재단 관계자는 “문화적 혜택에서 소외된 농어촌 아이들은 대체로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일주일에 한두 차례 음악 교육을 한다고 해서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의문이다. 농어촌희망재단이 주관하는 오케스트라 활동에 참여하는 인원은 1000명 정도다. 교육부 등 다른 기관의 프로그램까지 포함하면 3000명 정도가 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 정도의 적은 숫자로 거대한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은 나올 수 없다.

그렇더라도 정치가들이 흔히 내세우는 ‘공짜 시리즈’나 ‘소외계층 보호’라는 탁상공론 구호보다는 당사자들에겐 훨씬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연주회를 마친 청소년들의 밝은 얼굴이 확실한 증거였다. 지휘자 금난새 씨의 경우 재능 기부 형태로 농어촌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대가 없이 묵묵히 사회 공헌에 나서는 예술가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노력들이 계속 쌓일 때 언젠가는 큰 힘으로 바뀔 수 있다. 두 번의 연주회를 보면서 음악이 인생을 변화시킬 수도 있겠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소중한 수확이었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