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틀째 위기 넘겨… 14일이 고비
13일 경기 의정부시 신곡동 서해 그랑블 아파트 관리사무소 최윤일 관리과장이 한국전력 직원의 협조 요청을 받고 “오후 2∼5시에 에어컨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안내방송을 하고 있다. 의정부=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한전에서 나왔습니다.” 배찬섭 한국전력공사 경기북부본부 차장이 이 주민을 지나쳐 관리사무소 문을 열었다. 에어컨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협조를 구하러 나선 길이었다. 1485채가 들어선 이 아파트 단지는 최대로 쓸 수 있는 순간 전력량이 3000kW로, 중형 공장에 맞먹는다.
배 차장은 최윤일 아파트 관리사무소 과장에게 “죄인의 심정으로 부탁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한전에 원전 가동 중단의 직접적 책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전력난에 대한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것이다.
이틀째 불볕더위에 시달렸지만 이날도 기업, 공공기관, 가정에서 절전에 적극 참여해 전력난은 최악의 상황을 면했다. 절전으로 확보한 전력량은 540만 kW로 당초 목표치(506만 kW)보다 많았다. 30도를 넘는 무더위에는 통상 1도씩 올라갈 때마다 100만 kW 정도의 전력수요가 늘어나는데 시민들이 에어컨을 끄고 폭염을 견딘 덕분이다. 전날 수도권 일대 대단지 아파트에서는 9일보다 전력 사용량을 4∼5% 줄이기도 했다.
절전 분위기에는 규모가 작은 공장도 동참했다. 경기 양주시 광적면의 폐가전 처리업체 KRC는 14일 오후 5∼6시의 한 시간 동안 폐냉장고 처리 조업을 멈추겠다고 한전과 약정했다. 폐냉장고 처리는 이 공장의 전력사용량 가운데 40%를 차지하는 공정이다. 한 시간은 폐냉장고 60∼80대를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이다. 오전 8시였던 조업 시작 시간도 이달 말까지는 한 시간 당기는 대신에 오후 4시에는 일을 끝내 전기를 아끼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강도 높은 대책으로 고비를 순조롭게 넘기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불만도 적지 않다. 당국의 관리 잘못으로 빚어진 위기에서 비롯된 고통을 기업과 시민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전력난은 원전 부품 비리로 3기의 원전이 멈춰서면서 전력 공급에 차질이 빚어진 탓이 크다. 잘못된 수요 예측도 위기를 더했다. 정부는 2006년에 내놓은 ‘전력수급계획’에서 지난해 최대 전력 수요를 6712만 kW로 내다봤지만 실제(7599만 kW)보다 턱없이 낮았다. 발전소 하나를 짓는 데 최소 5, 6년이 걸리므로 예측 실패로 인한 차질은 몇 년째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현장에 나간 한전 직원들은 종종 면박을 당한다. 정부의 강제 절전이 시행되는 대규모 아파트형 공장에선 “원전 비리는 정부에서 저지르고 왜 우리 보고 고통을 지라고 하느냐”고 항의하는 일도 잦다. 서울 명동에선 상점주들이 “영세 상인을 핍박한다”며 단속원을 쫓아내기도 했다.
의정부·양주=홍수영 기자 gae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