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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놀자!/조지형 교수의 역사에세이]전쟁은 질병 확산의 고속도로

입력 | 2013-08-14 03:00:00

제1차 세계대전의 승자는?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1918년 미국 캔자스 주의 펀스턴 기지에서 인플루엔자 감염 치료를 받는 병사들. 당시에는 질병에 대한 이해와 의학기술이 부족해 전투보다 질병으로 숨진 병사가 더 많았다. 동아일보DB

1861년에 시작되어 4년 동안 미국을 혼란에 빠뜨린 미국내전(남북전쟁)의 승자는 누구일까요? 아마도 서슴지 않고 연방군(북군)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노예해방을 선언한 에이브러햄 링컨이 이끈 연방군이 남부 연합군을 무찌르며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전쟁 사망자의 통계를 살펴보면 좀 이상합니다. 210만 명의 연방군 가운데 36만 명이 죽었는데, 전투 중 사망자는 6만7000여 명(19%)인 반면, 질병으로 죽은 사람은 22만4000여 명(62%)이나 되기 때문입니다. 병력 106만 명의 남부군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25만 명이 죽었는데, 그중 16만 명(64%)이 질병 사망자입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내전에서는 분명히 연방군이 이겼죠. 생태계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내전은 질병이 승리한 전쟁입니다. 인간은 질병의 발생과 확산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무지했습니다. 전쟁기간 동안 질병이 도처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막지 못했습니다. 불결한 위생시설과 습관을 그대로 방치했고, 의료지식도 매우 부족했습니다. 의사조차 환자의 피가 묻은 손을 통해 질병이 옮겨진다는 주장을 묵살하며 질병의 확산을 방치했습니다. 미국내전이 끝난 1867년이 되어서야 멸균소독 처리한 의료 기구로 수술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습니다. 로베르트 코흐가 박테리아를 분리한 시기는 1876년이고 결핵균과 콜레라균을 발견한 시기는 1880년대입니다.

인간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질병을 겨우 정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러일전쟁(1904년)은 하나의 전환점이었습니다. 러일전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질병 사망자가 전투 사망자보다 적어졌기 때문이죠. 이 전쟁에서 일본군 4만7000명이 전투로 죽었지만 질병으로는 죽은 병사는 2만7000명이었습니다. 인간은 전쟁을 치르면서 위생과 생태환경에 대해 철저해지고 전염병 확산을 비롯한 전쟁의 부작용에 대해 적절히 대처할 수 있었던 셈입니다.

전환점을 지났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모든 전쟁에서 질병을 정복하지는 못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역시 질병이 승리한 전쟁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인류 역사에서 가장 혹독한 재앙이 발생했습니다. ‘스페인 독감’으로 알려진 1918년의 인플루엔자입니다. 당시에 참전국이 언론을 통제했기에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던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독감이 언론에 보도되어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스페인 독감은 독감이 스페인에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오류를 담은 용어죠. 가능한 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4300만 명의 연합군과 2500만 명의 추축군이 싸웠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1600만 명이 죽었는데, 그 가운데 군인 사망자는 972만 명이며 이 중 약 3분의 1이 질병에 의한 사망자입니다. 의약품의 발달과 전쟁 무기의 발달로 전투 사망자가 질병 사망자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왜 제1차 세계대전이 질병이 승리한 전쟁이냐고요? 전 세계적으로 1918년 인플루엔자로 인한 사망자의 수는 2000만∼5000만 명이나 됩니다. 어떤 학자는 1억 명이라고 추정합니다. 1918년 인플루엔자의 사망자 수는 제1차 세계대전 그 자체의 사망자보다 훨씬 많은 것이죠. 이렇게 사망자가 많아진 이유는 전쟁 수행을 위해 수많은 군인을 징집하여 전쟁터로 보내거나 군수물자를 수송하면서 인플루엔자를 함께 옮겨놓았기 때문입니다.

다수의 역사가들은 1918년 인플루엔자가 3월에 미국 캔자스 주의 포트라일리(Fort Riley)에 있는 펀스턴 기지(Camp Funston)에서 처음 발병했다는 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단순한 계절성 독감이라고 판단한 미국 정부는 펀스턴 기지에서 훈련받은 신병을 유럽으로 파견했습니다. 그해 6월에는 영국과 독일까지 인플루엔자가 급속히 확산되었죠.

인플루엔자는 여름에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8월 말에 치사율이 훨씬 높고 전염성이 강한 인플루엔자로 다시 나타났습니다. 처음 인플루엔자 변종이 발생한 곳은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세 항구 도시, 즉 서아프리카에 있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 시에라리온의 프리타운, 프랑스의 브레스트, 미국의 보스턴 중에서 한 곳이라고 추정합니다. 이 항구에 주둔했던 해군과 정박했던 선박의 선원들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감염되어 인플루엔자를 전 세계로 확산시켰습니다. 내륙에서는 주로 철도를 통해 퍼졌습니다.

미국 워싱턴 주의 시애틀에서 운행하는 전차의 차장이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승객의 탑승을 거부하고 있다. 증기선과 철도는 인플루엔자를 확산시키는 ‘악마의 도구’로 꼽히기도 했다. 동아일보DB

문명의 이기(利器)라고 여겼던 증기선과 철도가 인플루엔자의 확산을 돕는 악마의 도구였던 셈이죠. 인도에서만 전체 인구의 5%에 해당하는 1700만 명이 죽었습니다. 특히, 호흡기 질병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된 알래스카와 태평양의 섬은 면역학적으로 취약했기 때문에 높은 치사율로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타이티와 서사모아 제도에서는 인구의 10∼20%가 죽었습니다.

의료 지식의 부족도 여전히 인플루엔자의 피해를 가중시키는 요인이었습니다.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마스크를 강제로 착용하는 조례를 제정했는데, 많은 시민이 헌법적 권리를 거론하며 마스크 착용이 불편하고 경제활동을 방해한다고 착용을 거부했습니다. 마스크 조례가 폐지되자, 사망률이 다시 치솟았습니다.

호주는 엄격하고도 실효성 있는 해상 격리조치로 인플루엔자의 그림자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격리조치와 질병통제 정책의 실효성은 거의 없거나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에만 급급했으니까요. 인류의 역사는 인간만이 만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인간은 지구 생태계 안에서 주변의 여러 가지와 상호 작용하는 아주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역사는 자연과학을 포함한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해야 합니다.

조지형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