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한 삶 살게 될까 두려웠다”
지난해 3월 16일 A 씨(22·여)는 인터넷 게임을 하다 알게 된 홍모 씨(25)를 경기 수원의 한 술집에서 처음 만났다. A 씨는 이날 홍 씨가 ‘술을 마시자’는 제안에 응했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했다.
성폭행을 당한 지 4개월 뒤인 지난해 7월에야 임신한 걸 알게 됐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게 전부인 A 씨는 생리가 멈추면 임신한 것이라는 사실조차 몰랐다. 성폭행으로 생긴 원치 않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낙태 비용 200만 원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홍 씨는 “돈이 없다”고 발뺌을 했고 결국 성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A 씨는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였다. 2011년 어머니(당시 54세)가 암으로 숨진 뒤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찜질방이나 고시원에서 생활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집을 나간 아버지(52)와 어렵게 연락이 닿았지만 아버지는 단칼에 도움을 거절했다. 결국 낙태비용을 마련하지 못한 채 낙태시기를 놓쳤다. 지난해 12월 지인의 소개로 광주의 한 산부인과에서 아들을 낳았다. 돈이 없었지만 ‘미혼모가 아이를 낳아 입양시킬 경우 출산비는 무료’였다.
그녀는 다음 날인 24일 오전 6시 눈을 떴다. 잠을 자고 있는 아기 얼굴을 보니 기가 막혔다. 오전 7시 반 A 씨는 아기의 코와 입을 손과 손수건으로 막았다. A 씨는 범행 당시 심정을 “아기를 바라보다 ‘나도 부모에게 사실상 버림받고 살았는데, 이 아이는 성폭행으로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낙태도 돈이 없어 못하는 바람에 태어났다. 얘는 나보다 더 비참하게 버림받을 것 같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아기를 죽이고 나도 자살하려 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A 씨가 엄마가 숨진 뒤 6개월간 우울증 치료를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A 씨는 경찰에서 “아기의 코와 입을 막았지만 곧 아기의 눈을 보고 힘을 줬던 손을 풀었다. 아기를 그냥 두고 거실 청소를 한 뒤 다시 아기를 살펴봤는데 숨을 쉬지 않았다. 급히 119에 신고해 도움을 요청했다”고 진술했다. A 씨는 범행 직후 조사에서는 “아이에게 분유를 먹이고 재웠는데 아침에 깨 보니 숨져 있었다”고 거짓말을 한 뒤 종적을 감췄다. 그러나 경찰은 부검 결과 아기의 뱃속에 음식물이 없었고 질식사한 사실을 확인한 뒤 추적 끝에 13일 충남 천안에서 A 씨를 붙잡았다.
광주 서부경찰서는 14일 살인 혐의로 A 씨를 구속했다. A 씨는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아들에게 주고 싶었는데 한순간 잘못된 생각을 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는 사고 직후 충남 천안으로 달아나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20대 회사원와 동거를 했다. 그리고 다시 임신(8주)했다. A 씨는 “이번에 아이를 낳으면 꼭 내 손으로 키우고 싶다”며 고개를 숙였다.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