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 (1973∼)
미안하지만 우리는 점이고 부피를 가진 존재다.
우리는 구이고 한 점으로부터 일정한 거리에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에게 멀어지면서 사라지고
사라지면서 변함없는 크기를 가진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칭을 이루고 양쪽의 얼굴이 서로 다른 인격을 좋아한다.
피부가 만들어내는 대지는 넓고 멀고 알 수 없는
담배 연기에 휘둘린다. 감각만큼 미지의 세계도 없지만
삼차원만큼 명확한 근육도 없다. 우리는 객관적인 세계와
명백하게 다른 객관적인 세계를 보고 듣고 만지는 공간으로
서로를 구별한다. 성장하는 별과 사라지는 먼지를
똑같이 애석해하고 창조한다.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나왔지만
우리가 만들어낸 자연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메바처럼
우리는 우리의 반성하는 본능을 반성하지 않는다.
우리는 완결된 집이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우리의 주변 세계와 내부세계를 한꺼번에 보면서 작도한다.
우리의 지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고향에 있는
내 방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찾아간다. 거기
누가 있는 것처럼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한 점을 찾는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인간이라는 생명체에 대해 왠지 모를 외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스스로 깊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존재에게 시인은 거두절미하고 한낱 ‘점’이라 한다. 우리가 안착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신화’를 깨는 그런 말을 하려니 미안할 수밖에. ‘미안하지만’으로 시작되는 이 시의 매력은 무미건조한 서술에 있다. 김언은 서정이나 정서나 감정보다는 사유에 호소하는 지성파 시인이다. 그의 건조하고 서사적인 시는 꼼꼼히, 깊이 읽어야 감이 온다. 뇌를 쓰는 즐거움, 뇌 근육에 알통을 키우는 즐거움을 주는 시!
또 이 시의 매력은 내용에 있지 않고 형식, 우리 인간의 존재와 삶에 기하학적 상상력을 발휘하고 넌지시 감칠맛 낸 표현에 있다. 시인은 기상천외한 생각을 펼치는 게 아니다. ‘모든 형태는 점에서 시작된다’는 건 ‘모든 생명의 기원, 우주의 기원은 먼지’인 것처럼 보편진리이니까. 나, 독자는 ‘삼차원만큼 명확한 근육도 없다’ 같은 시구에 반한다. 그 명확한 근육으로 보고 듣고 만지는 감각이, 그러나 미지의 세계라는 것을 시인은 논리적으로 증명한다. 그래서 ‘우리는 완결된 집이지만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이다. 허방이기도 하고 숨구멍이기도 한 구멍! 말미암아 우리는 미지의 것에 현혹되기도 하고, 페이스북에 빠져 시간을 탕진하기도 하고, 올가을엔 사랑할 거라는 꿈을 꾸기도 한다.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