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96>제명
자신에 대한 국회의원직 제명 처리안이 통과된 직후인 1979년 10월 4일 국회본회의장 자신의 의석에 앉아 관련기사가 큼지막하게 실린 동아일보(석간)를 보고 있는 YS. 동아일보DB
‘김 부장은 “어제 (제가) 박 대통령과 만나 늦게까지 술을 마시면서 약 2시간 동안 총재님의 제명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공화당에도 제명 명령이 내려갔습니다. 내일 오전 10시면 다 처리됩니다. 저는 대통령에게 제가 마지막으로 김 총재를 만나볼 테니 시간을 달라고 청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마지못해 승낙하더라는 것이었다. 김재규는 나에 대한 박정희의 감정이 극에 달해 있다면서 박정희가 (나를) 제명·구속할 것은 물론 죽이려 들 것이라고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총재님도 불행해집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막아야 합니다.” 그는 시종일관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나보다 박정희가 먼저 죽을 거요. 김 부장도 조심하시오”라고 말했다.’
YS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했지만 김재규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자 김재규는 “현재 우리나라의 모든 정세나 정보를 나만큼 많이 아는 사람은 없다, 박 대통령은 김 총재를 국회에서 제명하는데 그치지 않고 구속까지 하려는 후속조치도 세우고 있다”고 했다. 이어 우리나라가 처한 국가적 상황과 국제적 움직임 등에 관해 길게 설명을 한 뒤 “결국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파멸입니다. 우리는 파국을 막을 책임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도 양보를 해야 할 것이고 김 총재도 조금 참아 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거듭 “기자회견 내용이 와전되었다거나 과장해서 보도된 것 같다고만 해주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렇게만 해주시면 제가 제명 안 하는 방법으로 해보겠습니다”라고 했다.’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나는 김에게 “김 부장이 나를 잘못 본 것 같소. 당신이 지금 나에게 한 말은 결국 나의 발언을 해명하라는 말인데, 나는 결코 그렇게 할 수는 없어요. 나는 제명을 당하든 감옥엘 가든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소. (감옥에 가면) 내가 일시 죽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어떻게 보면 영원히 사는 길이오. 김 부장이 분명히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이번에 나를 제명하는 것이 이 정권의 종말을 재촉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오. 나는 지금도 박정희 씨가 불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소. 지금 박정희 씨를 구하는 길은 민주주의를 하는 길 이외에는 달리 길이 없소.”
YS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약 한 시간가량 지난 뒤였다. 김재규는 바깥까지 따라 나오면서 그에게 “한 번 더 재고해 주십시오. 일이 악화되면 김 총재나 각하나 다같이 불행해집니다”를 거듭 반복했다.
79년 10월 4일 공화당과 유정회는 여당 의원 총회실로 본회의 장소를 옮겨 여당 의원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YS 의원직 제명 처리안’을 상정했다. 국회는 이날 백두진 국회의장이 신청한 경호권 발동에 따라 본회의장 출입구와 복도를 300여 명의 사복 경찰과 50여 명의 국회 경위들을 동원해 차단시키고 야당 의원들의 접근을 막은 가운데 18분 만에 통과시켰다. 159표 전원 찬성이었다. 의정사상 첫 국회의원 제명 처리였다.
이에 대해 미국 정부까지 나서 유감을 표명하며 주한 미 대사를 불러들인다. 미 국무부는 4일 “우리는 한국 국회가 야당지도자 김영삼 씨를 제명한 것을 깊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논평했다. 경향신문 79년 10월 6일자는 이렇게 전한다.
‘사이러스 밴스 미 국무장관은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를 워싱턴으로 소환했으며 이에 따라 글라이스틴 대사는 6일 서울을 출발한다고 호딩 카터 미 국무부 대변인이 5일 밝혔다. 대변인은 미국 정부가 한국 국회의 김영삼 의원 제명사태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음을 4일 분명히 밝힌다고 말하고 국무부가 4일의 이 사태 논평에 뒤이어 5일 주한 대사에게 귀국을 요청했음을 지적해둔다고 말했다.’
신민당 의원들은 국회 등원을 무기한 거부하겠다고 밝혔다. 10월 13일엔 소속 의원 66명 전원이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통일당 의원 3명도 동조했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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