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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공감 Harmony/이 사람이 사는법]김민하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입력 | 2013-08-26 03:00:00

“신문이 세상을 이어주듯 그림은 나만의 소통 창구죠”



그림은 제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즐거운 놀이이면서 제 전공과 교육을 연구하는 데도 도움을 주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고고미술사학도에서 언론학 교수로, 최근엔 다시 화가로 변신한 김민하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자신의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 교수는 다음달 18일부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사람과 자연, 그리고…’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연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그림 속, 달도 별도 뜨지 않은 낯선 도시와 높이 솟은 건물들은 어딘가 뒤틀려 있다. 샛노란 시계탑, 분홍색 고층빌딩. 벽면을 채운 유화(油畵) 속 야경은 흔하디흔한 도시의 모습 같으면서도 어딘가 이질적이다.

다른 그림도 비슷하다. 정장을 입은 남성이 둘러멘 기타는 자신의 얼굴보다 몇 배나 크고 두껍다. 조막만 한 크기의 머리를 가진 여성의 다리는 웬걸 코끼리 다리처럼 굵다. 눈동자가 지나칠 정도로 크게 강조된 사람은 순박해 보이면서도 강렬한 안광을 뿜어낸다. 소재는 평범해 보이지만 어딘가 이질적이고, 익숙해 보이는데 어딘가 낯선 그런 그림들. 작가는 범상치 않다. 7년째 대학 강단에서 언론학을 가르치는 김민하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42)다.

김 교수는 대학에서 그림을 배운 적도 없고 전업 화가도 아니다. 그저 그림이 좋아 2년 전 그림에 빠져들었다. 이 신출내기 화가는 차곡차곡 완성한 그림을 모아 다음달 전시회를 열고 ‘화가 김민하’로 ‘커밍아웃’을 한다.》

뉴스의 본질, 캔버스에 담다

“저널리즘을 가르친 지 7년째, 뉴스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그림에서 찾기 시작했습니다.”(전시회 ‘초대의 글’에서)

뉴스의 본질을 어떻게 그림에 담는다는 말인가. 신문기자로 7년째 일하고 있지만 언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기자의 반응에 김 교수는 ‘프레임(틀)’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풍경화나 인물화 같은 것을 그릴 때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을 한정된 캔버스 안에 모두 표현할 수 없잖아요. 화가는 그중 어느 부분을 선택하고 어느 부분을 특히 강조할지 선택하게 되죠. 그게 프레임이죠. 언론의 현실과 똑같이 느껴졌어요.”

언론도 세상 모든 일을 신문 지면과 방송 화면에 담아내지 못한다. 뉴스를 ‘취사선택’하고 그중 어떤 부분을 강조할지 판단해 결정해야 한다. 마치 머리통보다 큰 기타를 멘 남자나 나체로 누운 여인의 코끼리만 한 다리처럼.

언론이 신성한 ‘팩트(fact·사실)’를 침소봉대(針小棒大)하고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편집한다는 말인가. 김 교수는 “그런 것이 잘못됐다는 뜻이 아니다”고 부연 설명을 했다. 다만 진실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기사들도 모두 언론사와 기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자체를 그림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제가 보고 느낀 것을 표현했지만 그림을 본 사람들은 또 다른 시선이나 느낌으로 볼 겁니다. 저에게 그림은 그냥 ‘소통’의 창구일 뿐예요. 신문이 세상과 독자를 잇는 소통창구인 것처럼.”

“누구나 그냥 해도 쓱 되는 재주 있더라”


“붓을 잡은 지 2년 만에 어떻게 전시회를 열 수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김 교수는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농담으로 받았다. 그리고는 “대학 때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했으니 그림에 대한 관심은 늘 있었다고 봐야 한다”며 웃었다.

그림 그리기는 ‘중년의 일탈’처럼 짜릿하면서도 은밀한 그만의 비밀이었다. 김 교수는 “이것저것 다 해 보고나서 뒤늦게 찾은 것이 그림”이라고 했다. 대학에 다닐 때는 사진과 도예에도 심취해 봤고 30대에는 재즈피아노와 얼후(二胡·우리나라 해금과 비슷한 중국의 전통 악기)에도 빠져들어 봤다. 하지만 배우는 게 일처럼 느껴지거나 싫증이 나 오래가지 못했다. 김 교수를 강하게 매혹시킨 것은 그림이었다. 그에게 그림은 힘든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중독’이었다. 그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가지 재주는 타고 나는 것 같아요. 제게는 그냥 해도 쓱 되는 게 바로 그림이었습니다.”

넓은 세상에 ‘엄친딸’은 없다

그는 학창시절 유복한 집안에 태어나 공부도 잘하는 요즘 말로 ‘엄친딸’(집안도 좋고 공부도 잘해 모든 것이 완벽한 엄마 친구 딸)이었다. 역사학을 좋아했던 그는 “더 다양하고 전문적인 분야로 진출할 수 있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을 듣고 1990년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온 뒤 평탄했던 그의 인생도 꼬이기 시작했다. 기자를 꿈꾸던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두 군데의 방송사와 한 군데의 신문사에 원서를 넣었다. 결과는 모조리 탈락. 경쟁에서 뒤처져 본 적 없는 김 교수에겐 난생처음 느끼는 좌절과 위기였다. “내가 공부가 부족해서 떨어졌나 보다 하고 생각했어요. 공부를 더 해 와서 기자가 되겠다며 유학을 결정했죠.”

그는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과정을 밟았다. 지도교수에게서 학점 체계에도 없는 ‘A++’를 받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여학생’에 대한 보이지 않는 차별의 벽은 높았다. 여리기만 했던 그는 단단해져갔다.

석사 3학기째인 1996년 겨울. 미국은 재선에 나선 빌 클린턴 대통령과 이에 맞선 공화당의 밥 돌 후보의 대선 경쟁이 치열했다. 한 교수가 “대선 여론을 파악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제시하라”는 과제를 냈다. 가장 뛰어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뉴욕타임스와 함께 진행하는 여론조사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두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느냐’고 묻는 대신 특정 이슈에 대해 ‘두 후보의 정책 차이를 설명해 보라’는 질문을 던지자”고 아이디어를 냈다. 낙태, 총기 규제법 등 논란이 되는 이슈에 대해 두 후보의 공약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지 물어보자는 것. 더 잘 알고 있을수록 투표 의지도, 지지 후보도 명확할 거라고 생각했다.

며칠간 끼니도 거르며 끙끙대고 짜낸 그의 제안은 최우수 아이디어로 뽑혔다. 만장일치였다. 하지만 해당 교수가 다음 강의시간에 뉴욕타임스 프로젝트를 함께할 학생이라며 데려온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그가 낸 아이디어를 엉뚱한 백인 남학생에게 넘겨준 것이다. 그는 석사 학위를 받자마자 미련 없이 영국으로 떠났다.

“이제는 ‘좋은 화가’라는 말도 듣고 싶어”

영국에서 정치언론학을 전공하며 하루 14시간 이상을 연구에 매달렸다. 이를 악물고 3년 만에 박사학위를 땄고 같은 대학의 연구교수가 됐다. 그는 “고3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2006년 성균관대 교수가 돼 9년간의 유학생활을 접었다. 해외에서 공부하고 학자로 성장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귀국을 결심한 이유를 묻자 ‘쿨’한 대답이 돌아왔다.

“짜장면이 그렇게 먹고 싶었어요.”

돌아온 대학은 떠날 때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던 학회 문화가 사라지고 학생들은 취업 경쟁에 목숨이라도 걸 기세였다. 그래도 긍정적인 면이 보였다.

“학생들이 그때와 비교가 안 되게 적극적이라서 놀랐어요. 제 의견에 반대한다며 손을 번쩍 드는 학생도 있어요. 1990년대 강의실 밖의 운동권 동아리나 학술모임에서 벌어지는 난상토론이 요즘은 강의실에서 벌어집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상상도 못 할 일이죠.”

김 교수는 학생 수만큼 마이크가 설치된 강의실을 고집한다. 귀국해서 꼭 하고 싶었던 ‘정답 없는 토론 수업’을 하기 위해서다. 2학기 강의부터는 자신의 그림을 교재로 활용할 계획이다.

“연구는 분에 넘칠 정도로 충분히 했어요. 이제는 학생을 어떻게 잘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좋아하는 그림 그리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싶습니다.”

좋은 화가와 좋은 교수 중 어떤 사람으로 평가 받고 싶은지 물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김 교수가 가만히 웃으며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면 붓을 잡은 후로는 ‘좋은 화가’라는 말을 더 듣고 싶어요. 나이가 더 들어도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봤어요. 삶이 더 윤택하고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더니. 김 교수의 ‘롱런’ 전략은 늦게 배운 그림에서 시작했다. 전시회는 다음달 18일부터 23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주제는 ‘사람과 자연, 그리고….’

이원주 기자 takeoff@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