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월 이산가족 상봉 소식에 마음 졸이는 김영보 할아버지
김영보 씨가 24일 오후 경기 부천시 소사구 자택에서 북한 지도의 아오지 탄광 지역을 가리키며 “형(김윤보 씨)이 이곳에 있었다고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부천=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김영보 씨(63)는 24일 오후 경기 부천시 소사구의 자택에서 본보 취재팀을 만나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거실의 TV에선 남북 이산가족 상봉 합의 뉴스가 한창이었다. 김 씨는 “형이 살아있다면 올해 83세”라고 했다.
대구 달성이 고향인 김 씨는 60년 전 형 윤보 씨와 헤어졌다. 4남 1녀 중 막내였던 김 씨는 당시 3세, 형은 스무 살이었다. 가난한 농사꾼 집안이었던 탓에 가족사진 한 장 찍지 못했다. 가족은 “형이 막내둥이였던 김 씨를 유난히 아꼈다”고 말했다. 밭일에 바쁜 부모님 대신 형이 김 씨를 업어 키우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98년 6월 25일 김 씨는 한 TV 프로그램을 보다가 황급히 옷을 챙겨 입고 방송국으로 뛰어갔다. 1997년 북한에서 남한으로 귀순한 국군포로 양순용 씨가 방송에서 “북한 아오지 수용소에서 국군포로를 여러 명 만났다”는 증언을 들었기 때문. 양 씨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김 아무개,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신 아무개…” 등 줄줄이 이름을 거론했다. 김 씨는 양 씨를 직접 만나 형의 소식을 물었다. 양 씨는 “아오지 수용소 부근 화학공장에서 대구 말을 쓰는 김윤보라는 사람을 알고 지냈다”며 “당신과 비슷하게 생겼다”고 했다. 김 씨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김 씨는 형을 찾기 위해 국군포로 가족 20여 명을 모아 2000년 대구에서 ‘국군포로가족협의회’를 결성했다. 그해 12월에는 북한에 형이 살아있다는 소식까지 들었다. 하지만 만나는 데는 실패했다.
그는 본격적으로 북한 주민과 국군포로의 탈북을 돕는 활동을 시작했다. 정보원을 통해 북한에 있는 국군포로 등의 소식을 얻은 뒤 남한에 있는 이산가족에게 전달해주고 탈북계획을 세웠다. “이 일을 하면 탈북한 사람들로부터 형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까 싶었다”며 “형을 찾는 게 우선이지만 혹시나 못 찾더라도 남을 도우면 하늘이 형을 찾아줄 거라고 믿었다.” 김 씨가 지금까지 탈북시킨 사람만 국군포로가 5명, 일반 탈북자가 20여 명, 납북어부가 3명이다.
2005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렸다. 1차 후보자 명단에 뽑힌 김 씨는 형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부풀었다. 그러나 8월 10일 정부는 “북측으로부터 형 김윤보 씨가 사망했다는 통보가 왔다”고 알려왔다.
그러나 김 씨는 여전히 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는 “중국에 수차례 건너가 북한 함경북도 인근 국경을 둘러봤다”며 “아오지 탄광이 있는 골짜기 입구가 바로 눈앞에 보였는데 그 안쪽 어딘가에 형이 있다는 생각에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고 털어놨다.
김 씨의 서재 벽에는 커다란 대한민국 지도가 붙어 있었다. 이 지도 북한 곳곳에 ‘아오지 수용소-형이 있을 것으로 추정’ ‘중국 정보원 접촉’ 등 메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김 씨는 25일 취재팀과의 통화에서 “형이 1차 명단에 들었는지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가슴 졸이며 뉴스를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 씨처럼 북한에 가족을 둔 이산가족들은 9월 25일부터 30일까지 열리는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 소식을 가슴 설레며 기다리고 있다. 대한적십자사는 24일 이산가족으로 등록된 생존자 7만2882명 중 고령자와 직계가족 순으로 1차 상봉 후보자 500명을 추첨으로 뽑았다. 이 중에서 선택된 이산가족 상봉자 100명의 최종 명단이 9월 16일 확정된다.
부천=이은택 기자·백연상 기자nabi@donga.com